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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박상건 唐津文化院 3월3일이르러드디어예산읍에서윤칠영(尹七榮)등5명이서울을비롯한전국각지에서 벌어진만 세이야기를주고받다가그들도만세를부르며시위에참가하여야한다는결론을얻고그날 밤11시30 분경읍내동쪽산으로올라가목이터지도록대한독립만세를불렀다.또부여지방에서는 부여군천도 교구(天道敎區)에서교인김태호(金泰昊)가서울로부터온독립선언서두장가운데한장을 이범인(李範 仁)에게주고또한장은은산면시장에사는김팔만(金八萬)에게주어만세운동을서두 르게한것이 충남지역만세운동의효시가되었다. 이렇게해서불붙기시작한만세운동은독립만세시위,봉화등의방법으로각지에번져 나가시위가 전개되었다.한낮에관헌(官憲)의단속이심하면밤에횃불을들고산으로올라가서독립만 세를불렀으 며산에서독립만세소리가터지면벽지의서민(庶民)들도산으로뛰어오르며봉화를밝히 고독립만세 를불렀다. 당진군에서있었던만세운동에참여한중요한시위를간추려보면다음과같다. 1.정미면(貞美面)3․1운동(三․一運動) 1919년정미면(貞美面)에서도만세운동을벌였다.4월4일천의리(天宜里)시장의장날에 1천여명의 장꾼들이만세를부르며경찰주재소에몰려가주재소를부수고,경찰2명에게부상을입혔 다.일본수비 대는이를진압고자출동하여현장에서21명이체포당했다.이곳에살던일본인(日本人)은 서산(瑞山)으 로이사하고,주재소는못쓰게되어한동안폐쇄되었다.또4월8일에는수당리(壽堂里),여 미리(餘美里) 정원환(鄭元煥)을비롯한주민3백여명이밤10시경횃불을들고시위만세를불렀다.마 침이를막기 위한일본보병과경찰이급파되어발포하니이에맞서투석으로맞서싸우다가해산하였다 . 2.면천면(沔川面)3․1운동(三․一運動) 1919년면천면(沔川面)에서도만세운동을벌였다.3월10일면천보통학교학생2백여명이 오후3시경 태극기를앞세우고독립만세를부르며시위행진을하다가경찰의제지를받고해산하였다 .이어4월2 일에는수많은군중들이만세를부르며시위행진을하였다.또4월4일에는10개부락이상 의면민들이 부락단위로산위에올라가횃불을들고독립만세를불렀다. 당시(1919.4.6보고)일본군조선군사령관(朝鮮軍司令官)이일본육군대신에게보고된자 료에의하면 「4월4일당진군면천면(沔川面)8개리각소(各所)에서산상(山上)에분화(焚火)독립만세 를고창(高唱) 하였기해산시켰다」라고기록보고하였다. 3.순성면(順城面)3․1운동(三․一運動) 이곳순성면(順城面)에서도만세운동이있었다.4월3일과4일에,면내10개마을주민들이 산에올라 가횃불을들고독립만세를불렀다. 당시(1919.4.6보고)일본군조선군사령관이일본육군대신(陸軍大臣)에게보고된자료에 의하면 「1919.4.4당진군순성면(順城面)내10개리에서산상(山上)에올라가구화(篝火)분화(焚火 )하여독립만 세를높이불렀기해산시켰다」고기술하였다. 4.당진읍(唐津邑)3․1운동(三․一運動) 당진읍(唐津邑)에서도4월4일에읍민들이횃불을들고만세를부르며시위를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