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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들에게 듣는 논산의 근․현대사 이야기 / 47 이런 실정이니 우리 마을에서도 소작농 중에 실제로 자살 하는 사람 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 동양척식회사의 토사권업에서는 소작료를 전체 수 확량의 30% 정도 밖에는 안받아갔다. 이러니 서로 그 일본인들 논을 지으려고 이런 저런 사람을 줄 대어 아부 하고 하는 실정이었다. 8.15 광복 직후에도 일본사람들이 쓰던 가구며 옷, 그릇 등 생활도구 들을 서로 싸게 사려고 일본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했는데 청년들이 나 서서 일본인들의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못하게 밤낮으로 지켰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이 아무도 사지 않으면 그냥 다 놔두고 갈 것을 왜 돈을 주고 사서 일본인들 만 좋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일본사람들이 다 물러간 다음 이런 물건들을 자기들 이 차지하고 이 사람들이 우익단체인 독립촉성회 혹은 대한청년단에 가담하여 활동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배신감을 느 낀 민심이 이들을 떠나게 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은 물론 아주 사소한 일 이라 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일반 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인이 됐다. 사실 일반 농촌사람들은 어떤 뚜렷한 이념이나 사상이 있어서가 아 니라 자기가 평소에 존경하고 좋아했던 지식인층을 많이 따랐는데 이 때 농촌의 지식인층에 좌익 계통이 많았다. 이 지식인들은 평소에 마을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었던 데다 옛날부터 배고프고 어려운 형편에 일제의 핍박을 받고 살던 상황에서 해방이 되고 이제는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열린다는 희망 을 주는 연설을 하고 다니니 많은 사람들이 이 분들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