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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들에게 듣는 논산의 근․현대사 이야기 / 7 처음엔 일본 가서 공부해야 된다며 사양 했으나 어머니께서도 편찮 으시고 또 어머니께서도 일본 유학을 반대 하시며 군청에 근무하기를 원하셔서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있게 되었다. 이후 바로 정식 직원 자리가 났는데 당시 군수, 내무과장 등이 취직을 부탁하는 이력서 받아놓은 것이 책상에 수북이 쌓여있는 상황 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읍면서기 시험에서 1등 한 사람도 이 자리를 노리 고 지원 해 와서 내가 들어가기는 대단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행정계 직원 등의 권유로 나도 시험에 응시하였다. 거기서 우수한 성적을 얻어 그 자리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그 때 처음 받은 월급은 30원이었는데 당시 쌀 한 가마에 10원이 었으니 대략적인 물가의 비교를 해 볼 수 있다. 세금 징수원 여비로 매월 8원을 별도로 더 받고 하여 생활이 상당히 윤택해졌다. 자전거 헌 것 한 대를 15원에 사서 출퇴근과 업무용으로 사용했다. 나는 공무원을 하면서도 “수험계” 라는 요즘의 학습지 비슷한 제도 로 공부를 계속 했다. 1941년 12월 8일 2차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으로 유학이 일체 금지되 었다. 1942년부터는 인문계 학교를 이공계로 점차 전환하고 입학생들도 이공계만 받았다. 공무원들도 각반1) 차고 전시 체제 비상근무에 들어갔다. 중졸 이상 으로 공무원 등 국가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청년들을 군 인에 지원 하도록 강요했다. 1) 각반(脚絆): 발목에서부터 무릎아래까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가죽 또는 억센 헝겊으로 감싸는 일종의 보호대로 주로 군인, 경찰들이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