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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2월28일 수요일 7 (제134호) 관향조 종친회 밀성(밀양)박씨는 신라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세손(世 孫) 왕자중 휘 언침(彦 )이 밀성(密城, 현 밀양)의 대군으 로 봉작(封爵)되었기로 그 본관을 밀성(密城) 또는 밀양(密 陽)으로하였다. 밀양은 원래 삼한시대에 변진(弁辰)의 일부로 미리미동국 으로 부터시작하여신라(제22대지증왕6년(505년)에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이 되었다가 757년 경덕왕16년 밀성군(密城 郡)으로개칭되었다. 이후 고려시대 성종14년(995년) 전국을 4도호부 10도로 구 분할때 경주와 함께 영동도에 속했으며, 밀성군의 격을 높여 븮밀주군븯으로개칭하였다. 또, 현종9년(1018) 븮밀성군사븯로 충열왕 원년(1275년) 방 보,조천등 의 반란으로 계림부에 속하다가 후에 븮밀성현븯으로 승격되었으며 충열왕11년(1285년) 븮밀성군븯으로 승격되었다 가공양왕2년(1390)븮밀양부븯로승격되었다. 조선시대 태조원년(1392년) 븮밀성군븯으로 칭하다 태조3년 (1394년) 븮밀성부븯로 다시 환원되었으며 태종원년(1401) 븮밀 성군븯으로 되었다가 태종15년 (1415) 주민의 호수를 기준하 여 천 호 이 상 의 고 을 을 모 두 도 호 부 로 만 들 게 되 었 는 데 이 때 븮밀양도호부븯로 되었다. 고종32년(1895년) 칙령 제98 호에 의 거 23부제 실시로 소지역주의를 채택함에 따라 도 이하의 부, 목,군,현 도 폐지되고 전국이 36군으로 개편될 때 븮대구부 밀 양군븯(시지역은부내면)으로되었다. 조선조말 1896년(광무1년)근대적 지방제도개편에 따라 경 상남도 밀양군이되었고 1931년4월1일 밀양면이 밀양읍의로 승격(대전,순천,안동 등과함깨) 1989년1월1일 밀양읍이 군과 분리 밀양시로승격 1995년 1월 1일 밀양시는 다시 군과 통합 됨(도,농복합형의밀양시:2읍9면6동) ▶위치 경상남도 북동부에 위치,동서길이 38㎞ 남북길이 24.5㎞ 총 면적 795.98㎢창원,마산 45.2㎞,부산 79.14㎞대구 8534㎞,울 산77.1㎞,창녕39.3㎞,인접중간지점에위치함. 신라 시조대왕 혁거세의 第29世 경명왕의 팔왕자의 으뜸으 로 밀성대군을 봉하였는데 지금 밀양부에 이궁대, 풍류현, 세 루정이 있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왕이 노닐던 곳이라 한다.대군은 신라왕의 적자로서 이곳에 분봉 받았다.이 본궁 에는 처음 신라의 어진 이가 있었으나 새로운 백성들이 동화 되었으니 이는 동경의 태평성세라 할 것인즉 궁, 현, 정의 이 름도 다시 일반 풍속에 딸린 말이다.권양촌이 이조 유사에 기 록하기를대군의유적이라고말했다. ○배위와 묘소는 상세히 알 수 없다.옛 말에 의하면 영남루 의 터가 그 유적이라고 말하더라(밀성제지에서 옮겨씀) 밀성 대군단은 경남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 경내에 설치되었으며 (享 陰3月3日, 9月9日)그리고 밀양시 무안면에 설치한 경덕 단이있다(享 陰3月4日 9月10日),또 숭성전(전남 순천 享 陰4 月1日),원덕사(충북 옥천군 享 陰3月1日), 율산서원(경북 경 산享陽10月3日)에배향되어있다. 단이 경상남도 밀양군 봉무산 아래 능파강 위의 영남루 북 쪽 언덕에 있으나 곧 대군의 수봉한 금성의 유지다(사실이 여 지승람과 권근의 본조유사에 실려 있음)구보를 고찰하니 숭 정 七년 갑술(1634년)에 현령 희와 수춘 등 三十七인이 본부 사 이유달과 이곳에 사당을 세워 대군을 향사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이로부터 三백년간 뒷사람들이 개연히 뜻을 두고 선배의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일이 심히 중대하여 까마득히 합의치 못하였더니 신라 기원 1981년 갑 자에 (서기 一九二四) 밀양 종인의 주최로 八도에 통고하여 크게 종회를 영남루에서 개최하고 설단하여 향사할 것을 건 의하니 이해 五월 三일이다. 원근에서 회의에 온 사람들이 千 이나 되는지라 말과 뜻이 통하여 비를 다듬었으니 四개월이 지나 공사 마친지라 대견하다 오래하지 못한 일이 속한다면 속하고쉽다면쉽도다. 삼가 고찰하니 이해(서기 一九二四년)전 임술(1922년) 윤 五월 十三일에 큰 비가 쏟아지듯 하여 겉흙이 패인 뒤에 영남 루 북쪽 뜰에 하나의 큰 묘자리 흔적이 있는지라 누 아래 있던 사람이 보고서 달려가 부근에 사는 박씨에게 말하여 여러 사 람이 와서 보니 과연 오래된 묘자리라 이에 전 군수 박상일 교 리 박해철 주사 박태진 박장억 등이 들은 즉시 살펴보고 써 밀 양의 수로들이 자고로 전해오는 말이 밀성대군의 묘소가 영 남루 부근에 있다는 것이 과연 헛되고 허망한 소리가 아님을 이로써 믿음직하다. 그러나 이미 지석이나 증명할 만한 고증 이 없 는 즉 그 신 중 하 여 야 할 도 리 에 의 심 이 없 을 수 없 고 또 한 등한이 보아 넘길 일도 아니어서 이에 설단을 하고 비를 세 워 별도로 제각을 세우고 향사를 하면 마음에 미안할 바 없고 의리에도 당연히 행하여야 할 일이므로 밀양과 청도의 두 고 을의 종인과 협의를 하여 단지 대부할 것을 관에 신청하니 익 년계해년(1923년)겨울 허가를 얻으니라. 이로 인하여 八도에 종회를 소집하여 결의를 거쳐 드디어 그 자리에 돌을 깔고 단을 모으고 단상에 비를 세우니 단지가 무릇 十二평이라 면에 다듬은 돌을 깔고 상하양방에 대를 쌓 고 대우에 돌아가며 석란 석주 十二개를 세우니 고가 모두 길 이넘었다.또쇠줄로옆에석란과석주를꿰어쳐서사람이들 어 오지 못하게 하고 한가운데의 축단한 비면에 신라왕자 밀 성대군의 단이라 쓰고 전면에 향로를 두고 향로 양쪽에 아래 로 무장관 대석을 세우고 문주위에 두개의 둥근 유리 장명등 을 꽂아놓고 쇠로 자물쇠 노와 사람들이 오는 것을 금하고 문 밖두곁에석대위에각각사자석이있다. 우리 박성(朴姓)에 본관(本貫)제도(制度)를 정할 당시(當 時)에는 지명(地名)이 밀성(密城)인고로 밀성대군(密城大 君)후손(后孫)은 본(本)을 밀성박(密城朴)으로 정하였는데, 고려공양왕시대에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 지명이 밀양(密 陽)으로 변경되었으므로 신지명인 밀양(密陽)으로 부르지만 문헌(文獻)에는 대개 밀성박(密城朴)으로 사용(使用)한다. ( 밀성재지209P ) 그러므로 문헌과 대종회의 공식명칭은 ‘密城朴氏大宗會’라 하고각소파에서사용하는본관명칭은밀성(密城)또는밀양 (密陽)등자율에맡기고현재에이른다. 밀성(밀양)박씨는 12중조를 중심으로 12계파(系派)로 분 파되었다. ▶12계파는다음과같다. 태사공파(은산, 행산, 좌상, 어변당)/도평의사공파/좌복야 공파/사문진사공파/충헌공파/규정공파/밀직부원군파/밀직 부사공파/영동정공파/판도판각공파/삼사좌윤공파/정국군 파이며, 적장자인 종손파는 태사공(太師公) 후 은산파이다. (밀성재지의순) 밀성박씨 대종회는 12중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후손들은 12중조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언제부터12중조의명칭이등장한것일까? 1742년(영조18)임술년에 인간(印刊)된 밀성박씨연계대보 (통칭 임술년보)에 수록된 ‘密城朴氏 大君之后 12中祖 世系 分派之圖’가처음 등장한다. 곧 12중조를 연계해서 세대를 표기한 창시보의 하나이기도 하다. 임술보의 밀성대군계 12중조 사실(번역문)을 언급해 본다. 전략븣.우리밀성박씨는신라왕에서근본하고팔대군이탁평 (啄評)을 나누어 다스림으로부터 성씨(姓氏)를 받아 본관을 달리 했다. 우리 종족(宗族)은 곧 밀성대군을 비조(鼻祖)로 삼으니 신라를 지나고 고려를 거쳐 국조(國祖:朝鮮朝)에 이르 러서는 팔방에 만연(蔓延)하며 울연(蔚然)히 동방의 대성이 되었다. 이문정공(李文靖公 : 牧隱 李穡)이 이르기를 뷺팔대군의 집 안은 모두 후손이 있으나 밀성(밀양)이 더욱 드러났다뷻고 하 니 진실로 그러하다. 대군의 뒤로 신라 중엽에 이르기까지 휘 욱(郁)이 있어 삼한대장군이고 아들 휘 란(瀾)은 요동독포사 이다. 이문충공(李文忠公 :樵隱 李克禮)이 이르기를 뷺밀양의 박 씨는 파(派)의 흐름이 심히 번성하나 그 근본은 곧 공으로부 터 다 나왔다뷻고 하니 옳은 말이다. 이 아래로 이십사대는 보 첩(譜牒)에전하지않고 고려 이래로 각파가중조(中祖)를일 컫는데 이는 대개 열 두분의 이름난 분들이니 시중 밀성부원 군 휘 언부(彦孚),도평의사 밀직군 휘 언상(彦祥),좌복야 밀 직군 휘 언인(彦仁), 사문진사 휘 원(元), 밀성군(시호 충헌) 휘 척(陟), 사헌부규정 휘 현(鉉), 중서 밀직부원군 휘 중미 (中美),밀직부사 휘 양언(良彦),영동정 휘 원광(元光),판도 판각휘천익(天翊),삼사좌윤휘을재(乙在),정국군휘위다 대군의운잉(雲仍:遠孫)이니 곧마땅히세차를 상고하고소목 (昭穆)을 차례지우는 의(義)가 있어야 할 것이다븣. 이하 생 략 ※註 소목(昭穆) 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 왼쪽 줄을 소(昭)라 하고,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하여 1세를 가운데에 모시고 2세, 4세,6세는소에모시고,3세,5세,7세는목에모신다. 뱚관향조약사 밀성(밀양)박씨 창간 11주년을 맞이하는 동안 본보에서는 본관별약사를 전해온바 있다.밀성박씨에 대해서는 2007년 5월호 12면 에게재한바있으나최근들어많은성손들이‘밀성’,‘밀양’등관향에대해예기가분분하고있는바1997년당 시영 배대종회장(규정공后)재임시이를명문화하여밀성재지에수록한사실이있어이를근거로하여소개해본다 . 밀양시전경(밀성대군단 중심) 뱚■밀성박씨연원 뱚■밀양의지명에관한내역 뱚■밀성대군사실(密城大君事實) 뱚밀성대군단사실(密城大君壇事實) 밀성대군단(경남밀양시내일동영남루 광장) 뱚밀성박씨(密城朴氏)를 뱚밀양박씨(密陽朴氏)로사용하는由來 뱚밀성박씨12중조사실 밀성재 전경(①밀성재 본당 ②익성사 ③추화재 ④세루정 ⑤식당 ⑥돈경 문⑦밀성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