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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은 경기 여주(驪州) 사람이다. 1919년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참여한 이래 임시정부 여주군(驪州郡) 담당의 국내조사원(國內調査員)과 법무부 참사(參事)등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있는 지강대학(之江大學)을 졸업한 후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과 임시정부 비서국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상해청년동맹회(上海靑年同盟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에 선정되었으며 경제후원회(經濟後援會)를 만들어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12월에는 임시의정원 헌법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가 1927년 1월에 의원직을 사직하였다. 1931년 한국교민단(韓國僑民團)의 의경대장(義警隊長)으로 활동하면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조직하여 조직의 재무를 맡았으며, 애국단(愛國團) 조직에 참여하여 김 구의 주도하에 계획되어진 윤봉길(尹奉吉)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의 의거를 적극 지원하는 한편 1936년부터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937년 2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하였으며, 임정의 결산위원을 담당하였다. 1940년 5월 3당 통합운동에 참여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그 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1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외무위원회(外務委員會)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0월 11일에는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의 한국측 이사에 선임되었다. 1944년 5월 임시정부의 선전부장 및 주석판공비서에 임명되어 광복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광복후 1945년 11월 백범(白凡) 김 구(金九)와 함께 환국하였다. 광복후 민주의원의 의원등으로 활동하다가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