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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손병희 선생의 독립운동에 추종하다가 기미년 3월 말에 귀향하여 향리 선후배 동지들과 협의하고 동조를 받아 독립만세 시위를 결의하고 격려문 경고문을 작성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군중을 동원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4월 3일 북내공립보통학교 마당에서 8백여명 군중의 시위를 이르키고 당일 여주읍까지 행진하고자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오학리 강변에 이르러 왜병에게 체포되어 1년 6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왜병에게 적점이 찍힌 공은 광복기까지 언행과 생활에 제약을 받는 중에서도 고충을 다하였으나 광복후에도 빛을 보지 못하고 초야에 은거하다. 1968년 7월 24일 73세를 일기로 여생을 마쳤다. 나라의 질서가 잡히고 경제가 안정되면서 독립유공자 표창이 시작되더니 드디어 1990년 8월 15일 나라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국비 지원으로 비로소 단갈에 휘자를 알리게 되니 선열 앞에 부끄러움을 어찌하랴. 배 전주이씨는 1934년 10월 13일에 기졸하여 사달리 진좌원이 초장지이니 공묘에 합폄하였다. 육 1자 1녀하니 자는 종덕 녀는 종건이다. 종덕의 초취 광산김씨는 조졸무육하고 경주김씨를 취하여 육 3자 2녀 하니 자는 강연 수연 복연이고 장녀 태연은 현풍 곽현기에게 차녀 계연은 순천 김길원에게 각 출가하였다. 장자 강연은 진주 류태순을 취하여 동우 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