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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고을 이 산속에 묻히신 천도교 제2세교조 해월신사 최시형 님은 포덕전 33년(1827년) 신라의 고도 경주 황오리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5세에 어머님을 12세에는 아버님을 여의고 혈혈단신의 고아가 되어 하루 세끼 식생활을 유지 하기도 매우 고달픈 신세였다. 하지마는 17세 때부터 비로소 제지소의 일꾼이 되어 부지런히 일하고 저축한 결과 자립생활의 기틀을 마련한 다음 19세에 밀양 손씨댁 규수와 결혼하여 성가하게 되니 날이 갈수록 더욱 근면 성실한 역량을 발휘하여 그 이름을 인근에 떨치고 남다른 소임도 맡아보게 되었다. 35세 되던 포덕 2년(1861년) 한울님의 조화와 이치를 직접 수운대신사께 배워 깨닫기 위하여 동학교문에 들게 된 바 밤낮없이 정진하는 이 분의 모습과 줄기찬 신앙생활은 어느덧 대신사의 눈길을 끌고 드디어 막중한 도통의 계승자로 지목받게 되었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뛰어난 선각자와 성인이 내세우는 진리의 교훈은 매양 억세인 거부반응과 서련을 겪는 것이 사실이라.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천도를 외치며 온갖 수난 속의 농민대중을 신바람 나게 고무격려 하면서 민족적 차원의 인간혁명을 기도하고 제창하는 사민평등의 동학운동이 오백년 왕조 말기의 완명고루한 양반 권력층에서 용납될 리도 만무하여 위선 수운대신사가 포덕5년(1864년)에 억울하게도 사도난정으 죄목으로 피흘리고 순교하게 되니 동학교문 전체가 무자비한 탄압과 박해를 받고 얼핏 보아 재기불능의 괴멸상태에 빠졌다. 하지마는 이미 대신사의 도통을 계승한 해월신사만은 엄동설한을 맞이한 거목의 뿌리처럼 지하로 깊숙히 파고들어 교문의 소중한 문서 보따리를 둘러메고 계속 은밀한 포교 행각에 일심정력을 바칠지언정 결코 실망하거나 중단하지 않고 각지에 숨어사는 열선동덕들을 두루 찾아 위로 격려 하는가 하면 후일의 포덕천하를 위한 기본대책을 용의주도하게 다져나가는 것이라. 우선 대신사에게 물려받은 필사본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비밀리에 판각 간행하여 보급시키고 둘째는 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기라고 하는 새 윤리도덕의 본보기로 어린이와 부녀자의 인격부터 존중할 것을 강조하고 세째는 누구나 근로정신을 발휘하여 유진무퇴할 것을 당부 하였다. 이같이 20년동안 배양한 저력이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