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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김일주 선생 묘소 위성사진 이미지와 내 폰으로 현위치 위성사진을 비교하면서 찾으니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서예가인 그는 동양서화의 발원지인 중국에 가서 이를 연구하기 위해 1919년 7월 중국 베이징[北京]을 들렀다가, 상하이[上海]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이필주(李弼周)를 만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 참가하였다. 그는 임시의정원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임시정부가 점차 독립운동계의 구심적 위치를 상실해 가자, 이를 걱정한 그는 1921년 2월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정국을 재편하고자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소집을 요구하는 문건 ‘아(我) 동포(同胞)에 고(告)함’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국내 활동을 위해 동년 9월 귀국하던 도중 일경에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平壤地方法院) 신의주지청(新義州支廳)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패망이 예견되던 1944년 8월에는 여운형(呂運亨)·조동호(趙東祜) 등과 함께 건국동맹(建國同盟)을 결성하고, ‘불언(不言)·불문(不文)·불명(不名)’의 3대 원칙을 정하여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하는데 힘을 쏟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