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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헌주 이명:憲尉 경기도 고양(高陽) 사람이다. 구한말 관립 영어학교(英語學校)를 졸업한 뒤, 1904년경 하와이로 건너와서 1905년 하와이섬 고할라 지역에서 목사로서 「교회월보」를 발행하는 한편, 동년 8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지역 각 지방 한인들을 규합하여 한인상조회(韓人相助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한인 동포들의 자치생활을 지도하였다. 그 후 미 본토로 건너온 그는 1907년 버지니아주 로아녹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1907년 7월 초순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밀명을 받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의 밀사를 돕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로 건너가 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다가 1908년 3월 다시 뉴욕으로 귀환하였다. 그 후 1910년 다시 로아녹대학에 복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으며, 이듬해 뉴저지주의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19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李承晩)이 조직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이듬해인 1920년 6월 하와이로 파견된 그는 애국공채(愛國公債)를 발매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을 후원하였다. 또한 이승만과 함께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교사이자 목사로 활동하면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3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상임위원회에서 로스앤젤레스 재무부(財務部) 주미(駐美) 제4행서(行署) 재무위원(財務委員)으로 선임된 그는 중국 항주(杭州)로 이전한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애국의연금(愛國義捐金)을 모집·송금하기도 하였다. 1936년 5월 분열된 북미지역 한인민족운동단체의 부흥을 위해 소집된 각 지방 대표자회의(代表者會議)에 참석하여 북미(北美)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재건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부흥과 항일운동,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도모하였다. 이 때 대한인국민회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추진된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위원으로 선정되어 1938년 4월 총회관을 낙성하는데 헌신하였다. 1939년 중국서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에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선임된 그는 북미 대한인국민회 임원들과 함께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자,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1941년 1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猛虎軍)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자, 1942년 2월 자원하여 한인경위대(韓人警衛隊) 외교과(外交科) 정위(正尉)로 임명되어 매주 군사훈련을 받으며 대일 항전을 준비하였다. 또한 동년 10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 이사로서 미국정부 전략청(戰略廳)의 권유에 따라 『한국과 태평양전쟁』이란 비망록을 발간하여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한편,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활동을 전개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外交事務所)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동년 11월 새로이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위원을 선임하자, 외교위원으로 선출된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1944년 1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민족운동에 진력하였다. 1945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 평화를 준비하기 위해 개최된 연합국회의(聯合國會議)에 파견할 대표로 선임되어 활동하는 등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