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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권은 경북 경주(慶州) 사람이다. 상인이었던 부친 김용한과 모친 구달씨 사이에 5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1902~1903년 도일(渡日)하여 신문물을 익혔다. 1904년 하와이 사탕농장 노동자로 이민하여 오하우(ohau) 에와(ewa) 농장에 배치되어 일하였다. 1905년 5월 정원명(鄭元明)·강영소(姜永昭)·윤병구(尹炳求)·김규섭(金奎燮)·이만춘 등과 항일운동·일화배척(日貨排斥)·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에와친목회를 결성하고 1906년 5월부터 1년간 기관지 '친목회보(親睦會報)' 주필로 필봉을 휘두르며 한인들의 결속과 애국정신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강영소(姜永昭) 등의 도움으로 상점을 경영하면서 1905년 8월 호놀룰루에서 한인상조회(韓人相助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07년 3월부터 하와이 한인단체 통합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여 동년 9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24개 한인단체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고 하와이 한인의 통일기관인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창립하는 산파역을 하였다. 한인합성협회 조직 후 동회(同會) 총무와 기관지 '한인합성신보(韓人合成新報)' 주필로 선임되어 한인사회 통합운동과 민족의식 고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1908년 2월 신병치료차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그는 안창호(安昌浩) 등이 이끄는 공립협회(共立協會) 찬성원으로 가입하는 한편, 하와이 한인합성협회 대표자격으로 1908년 7월 덴버에서 박용만(朴容萬) 등이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에 참석하였으며, 공립협회와 한인단체 통합을 지속적으로 논의한 끝에 1908년 10월 양회 합동을 발표하여 1909년 2월 미주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국민회(國民會)를 탄생시켰다. 1913년 12월 이대위(李大爲) 목사의 주례로 강혜원(康蕙園)과 결혼한 뒤 중가주(中加州) 롬폭·다뉴바 등지에서 포도농장과 점포 서기 등으로 일하였으며,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재미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수전위원(收錢委員)으로 캘리포니아주 맨티카와 다뉴바지역을 순회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스스로 독립운동자금을 의연하기도 하였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단우번호 91번을 부여받고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흥사단 의사부장(議事部長)과 이사장(理事長)을 역임하며 흥사단을 위해 평생 젊음을 불사른 흥사단원이었으며, 그의 부인 강혜원(미국명 金蕙園)은 다뉴바에서 안창호의 도움으로 조직된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초대 단장으로 선임되어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41년 2월 중국 한구(漢口)에 있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후원할 목적으로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美洲後援會)가 1942년 5월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편입 이후, 1943년 1월 회명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미주지부(美洲支部)로 개칭하고 김원봉(金元鳳)의 민족운동을 후원하였다.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동년 9월 변준호(卞準鎬)·최능익(崔能益)·김강(金剛) 등과 더불어 기관지 '독'을 발간하고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선임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민족운동에 진력하였다. 노년에 접어들어 8년간 뇌일혈 증세로 고생하던 중, 1960년 1월 85세를 일기로 로스엔젤레스에서 사망하여 로즈데일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