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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투사 송계 정태봉 鄭泰鳳 선생 기적비 정태봉(1893~1944) 선생은 화순군 동복면 칠정리 동정마을 279번지에서 아버지 동래정공 기열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에서 3남 중 2남으로 1893년 5월 20일 출생하였다. 선생은 6세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학문을 더 넓히기 위해 13살 되던 해 숙부를 따라 순천 송광사에서 수학하는 도중 만해 한용운 선생을 만나 위국진충(爲國盡忠)이란 가르침을 받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하던 공부를 버리고 15세때 결혼을 하였으나 가정을 돌보지 않고 1908년부터 신문학 반대운동에 가담하여 10여년간 각처의 의사를 규합 구국운동에만 전념하다가 1920년 5월 총포화약취급 및 공갈미수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과 대구복심원 경성고등법원의 3심판결을 받고 징역 3년이 언도되어 옥고를 치루고 출소 후 상경하여 민생사(民生社)라는 항일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신간회(新幹會)가 발족되어 이에 합류 대구지부 총무를 맡아 활동하다가 좌파의 모략으로 신간회가 해체되어 공은 북경 상해 만주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임정의 밀명을 받고 귀국하여 ㄱ당을 조직 목적 사업에 전념하다가 1928년 진주에서 일경에게 치안유지법위반 및 공갈미수죄로 체포되어 5년형이 언도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당시 ㄱ당 사건은 일제를 당황하게 하였던 사건으로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대구형무소 복역 중 1000여명의 죄수를 봉기시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한 주동자로 6개월간의 독 감방생활을 하며 갖은 고역을 당하면서도 끝내 굴복치 아니하고 출옥하였으나 일정의 감시가 심하고 병세가 위중한 몸으로 본적을 신의주로 전적하고 구국동지를 재규합하려고 만주에 잠입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조국 광복의 찬란한 해를 보지 못한 채 1944년 향년 51세의 나이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으며 외아들 대운과 그의 처 안동김씨 사이에서 아들 재선과 승태 그리고 명숙 혜숙 혜경 영숙의 네 딸이 있으며 묘지는 동복면 유천리 산 242번지에 안장되어 있다. 1977년 독립운동가로 건국포장이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된 우리 고장의 훌륭한 애국 투사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