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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1월31일 수요일 7 (제133호) 기 획 최근 견훤의 서라벌 침공과 관련한 주요 사건의 추이는 크 게 3단계로 구분된 바 있다. 박순교, <신라‘景哀王의죽음과 고려구 원군 파병의 진위 문제>, 븮동아인문학븯38, 2017, p. 104 . 그 중 3 단 계 가 가장결정적임은말할나위도없다. 그런즉 3단계에 해당하는 견훤의 서라벌 침공,경애왕의 죽 음에 대해 보다 상세한 상황을 장면별로 재구성하여 볼 필요 가 있다. 이를 통해 경애왕 죽음에 관한 기록의 문제, 당시 상 황의 진실과 거짓을 재단할 잣대 역시 명징하게 드러날 것이 라여겨진다. 신라 경애왕의 죽음을 전하는 븮삼국사기븯의 3군데 기록 중 신라본기경애왕4년조기록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가-1)[A]正月~二月~三月~四月~ ①秋九月, 甄萱侵我軍於 高鬱府, ②王請救於太祖, ③命將出勁兵一萬往救. ④甄萱以救 兵未至, 以冬十一月, 掩入王京. ⑤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 娛, ⑥不覺賊兵至, 倉猝不知所爲. ⑦王與妃奔入後宮, ⑧宗戚 及公卿大夫士女四散, 奔走逃竄. ⑨其爲賊所虜者, 無貴賤皆駭 汗匍匐, 乞爲奴僕而不免. ⑩萱又縱其兵, 剽掠公私財物略盡, ⑪入處宮闕, ⑫乃命左右索王. ⑬王與妃妾數人在後宮, ⑭拘致 軍中 ⑮逼令王自盡, 뛝强淫王妃, 뛞縱其下, 亂其妃妾. [B]뛟 乃立王之族弟, 權知國事, 是爲敬順 븮삼국사기븯 권12신라본기12경 애왕4년조 위 기록을 살펴보면, 마치 영화의 장면들인 Scene과 cut을 정리한 듯, 주요 사건만을 간추려 ‘연속 편집’한 것처럼 비친 다. 드러나는 사건의 추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18장면으 로구성된다. ①견훤 고울부→ ②경애왕 구원 요청→③왕건 구원 파병→ ④견훤 11월 왕경 침입→⑤경애왕 포석정 주연→⑥경애왕 일 행 패닉→⑦경애왕, 왕비 후궁에 도망→⑧종척대부사녀 사방 도망→⑨(적에게)포로 전원 학살→⑩견훤, 공사 재물 약탈→ ⑪견훤 궁궐 거처→⑫경애왕 수색 명령→⑬경애왕,다수의 비 첩 후궁에 은신→⑭경애왕 일행을 백제 군중으로 압송→⑮견 훤 경애왕 핍살→뛝왕비겁간 →뛞비첩 집단 겁간을 하명→뛟 왕의 족제(王之族弟),경순왕옹립 위 18장면에서 검토할 대목이 몇 가지 있다.특히 ⑪에서 견 훤의 행적이 주목된다. 견훤의 최후 목적이자 가장 주요한 사 안, 곧 경애왕의 추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견훤은 포석정 일 대에 진군하여 자리하지 않고, 포석정에서 멀찍이 떨어진 서 라벌궁궐에거하고있다. ⑥~⑨에 이르는 포석정 사건에서 견훤은 보이지 않으며, 심 지어 ⑩에서부터의 사건 전개 과정, 특히 경애왕 추포 과정에 서조차견훤은전면에서활약하고있지않다. 전략과 전술에 능한 군웅, 견훤이 거병의 최종 목적이자 성 패를 결정지을, 자신의 으뜸 사냥물이라 할 경애왕이 아직 잡 히지 않았으며, 필히 잡아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모 든 승부수와 작전권을 ‘좌우’로 모호하게 표현된 아랫사람에 게 돌려놓고,정작 자신은 서라벌 궁궐에 거했다.이는 미심쩍 기 짝이 없으며,포석정,경애왕 시해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견 훤의 의도적 동선처럼 보인다. 박순교, <신라景哀王의죽음과 포석 정의문제>,븮택민국학논총븯19,2017 ⑫의 대목 역시 쉽게 문면대로 수긍하긴 어려우며 몇 가지 음미할 점들이 있다. 경애왕은 포석정을 불시에 덮친 군사들 을 따돌리고, 더욱이 아녀자(들)을 대동하고 은신했다. ⑦에 서는왕비1명,⑬에선비첩(妃妾)수인(數人)으로되어있다. 경애왕과 함께 동선을 같이 한 마지막 생존자의 숫자는 더 없이 중요할 것임에도,같은 책,같은 편 내의 기록이 몇 자 건 너 띈 행간을 두고 도저한 착간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포석 정을 덮친 군사들이 전부 보병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그렇다 면 신속,기동성을 위하여 기병도 포함되었을 터인데,대체 이 연약한 여자들이 어찌 추격하는 기마를 따돌리고, 그것도 왕 과 함께 같은 방향, 대오를 유지한 채 시종 탈출할 수 있었다 고는믿어지지않는다. 군사들의 으뜸 표적이었을 경애왕이 사방에 도사린 에움을 뚫고 연약한 아녀자와 더불어 탈출하였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가까우며,쉽사리믿기어렵다. 왕을 위시한 일행은 포석정을 덮친 세력에게 표적 중의 표 적이었다.수목의 이파리들이 죄다 조락한 만추~초겨울,백주 에다 그것도 군사들의 표적이나 다름없는 신라왕이, 치렁치 렁한 드리개로 장식한 아녀자들까지 대동하고 도망을 치는데 도, 도처에 깔린 군사들의 눈과 귀에 전혀 포착되지 않았고, 탈주에 성공했다면 그것부터 이상한 일이다. 혹여 당시 시점 이 야간이었던 것일까. ⑫의 문면을 따져보면, 주변이 가시거 리가 확보되는 대낮이었을 개연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야간 이라 하더라도 경애왕 탈출에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경애왕 이 주변 먼 지역으로 탈출하지 않고,후궁에 머문 점에서 경애 왕은 말을 타고 탈출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다면 말 도 타지 않은 경애왕이 기마를 따돌렸다는 것이 되니,더욱 기 이한셈이다. 경애왕이포석정경역을탈출한시점이이렇듯야간이라면, ⑤의 포석정 연오(鮑石亭 宴娛)는 ‘야연’이었던 셈이 된다.⑤ 의 연오(宴娛)가 ‘야연’이었다면, 경우의 수는 2가지로 압축 된다. 낮에 시작하여 밤까지 이어진 흥건한 잔치였을 개연성, 아니면야간에개막한잔치였을개연성이다. 어느경우이든사방이얼어붙는초겨울의밤이란시점에서, 또 견훤이 불시 침공을 선언하며 서라벌 조야를 살벌한 전운 으로 감돌게 한 절체절명의 시점에서, 유상곡수라면 당연히 거론되어져야 할 술꾼들, 혹은 시인묵객들을 제쳐두고, 경애 왕이 종척공경대부사녀로 표현된 대규모 인원을 거느린 채 혹한이 몰아치는 한겨울 일대 야연을 벌인다는 것이 과연 가 능했겠는가, 굳이 그리해야 했을 당위성, 필요성을 느꼈을까 하는원초적의문에휩싸이게된다. 당시 왕건이 견훤의 행각에 대해 어떤 입장을 견지하고 있 는지를 검토한다면, 견훤 행각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다고 본 다. 이와 관련, 븮삼국사기븯에서 논해진 견훤의 행악을, 같은 책 에 인용된 븮견훤의 편지븯, 븮왕건의 편지븯와 비교, 정리하면 다 음과같다. 븮삼국사기븯권50 열전10 견훤조에서는 견훤의 6대 죄악, 븮삼 국사기븯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에서는 견훤의 5대 죄악, 븮왕 건의편지븯에서는견훤의6대죄악이적시,거론되고있다. 위의 표에서 확인되듯, 견훤의 죄악 중 공통적으로 적시되 는 것은 경애왕 시해가 가장 으뜸이다.특히 경애왕 죽음과 거 의 동시대인 븮왕건의 편지븯에선 견훤의 6대 죄악 중 으뜸으로 경애왕 시해를 적시하고 있다. 반면 븮삼국사기븯 2군데 기록 (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븮삼국사기븯권12 신라본기12 경 애왕)에서는사건의흐름별로적시한느낌이짙다고보인다. 그 결과 경애왕 시해 항목은 븮삼국사기븯권50 열전10 견훤조 에 서 는 견 훤 의 7 대 죄 악 중 3 번 째 항 목 (3 . 컴王), 븮삼국사기븯권 12 신라본기12 경애왕에서는 견훤의 6대 죄악 중 4번째 항목 (4.逼令王自盡)으로 서술되고 있다. 특히 븮삼국사기븯는 견훤이 경애왕 왕비를 겁간했음을 적시 하고 있는데, 븮삼국사기븯권50 열전10 견훤조에서는 견훤의 7 대 죄 악 중 5 번 째 항 목 ( 宮引夫人亂之), 븮삼국사기븯권12 신라 본기12 경애왕에서는 견훤의 6대 죄악 중 5번째 항목에서 동 일죄상으로여겨지는내용을적시하고있다. 한데 경애왕의 죽음과 동시대라 할 븮왕건의 편지븯에서 견훤 의 경애왕 왕비 겁간을 유추할 구절은 견훤의 6대 죄악 중 5번 째 항목(5.姬姜則取以同車)밖에 없다. 정녕 견훤이 경애왕 왕비를 겁간했다면, 필시 왕건은 견훤 의 6대 죄악 중 첫째인 경애왕 시해보다 우선하여 적시한다거 나,아니면 최소한 둘째 항목에 왕비 겁간과 관련한 내용을 적 시했을 것이다. 견훤의 패륜과 악행을 드러낼 내용으로서, 단 연 ‘왕비 겁간’만큼 충격적이고 효과적인 죄상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왕건이 이처럼 왕비 겁간을 유추할 내용, ‘姬姜則取以同車’ 를 다섯째 죄악으로 적시했다는 것은, 견훤의 왕비 겁간을 부 정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왕건이 적시한 견훤 의 죄악은 ‘희강(첩)을 취하여 같은 수레에 태웠다’는 것인데, 왕건은 겁간이란 직설적이고 손쉬운 표현 대신 ‘같은 수레에 태웠다’는 식의 모호한 문학적,수사적으로 표현,비유로 일관 했다. 당시 견훤이 궁궐의 아낙네 몇몇을 수레에 태웠다는 것과, 경애왕의 왕비를 완력을 앞세워 직접 겁간,유린한 것은,내용 의 질에 있어 하늘과 땅의 차이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유언비 어를 포함한 악의적 선전,선동을 획책하고도 남았을,븮왕건의 편지븯에서조차 패륜의 상징적 사건인 겁간 항목이 없음은 유 의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후삼국 쟁패의 자웅을 가를 미묘한 시기, 민심의 동향을 일거에 왕건 자신에게 돌릴 절호의 호재 나 다 름 없 는 ‘견 훤 의 신 라 왕 비 겁 간 ’ 사 안 을 두 고 , 왕 건 이 븮왕 건의편지븯에서저처럼허투루처리,적시했을리없다. 븮왕건의 편지븯에선 뛞에서 보이는 죄악,이른바 견훤이 군사 들에게 하명, 경애왕의 비첩들을 집단 겁간하게 한 내용도 일 절 보이지 않는다.후백제 군사들에 의한 ‘신라 경애왕 비첩들 의 집단 겁간(윤간)’ 사안도 왕건에게 있어, 견훤을 공박하고 심리 전술에서 일약 우위에 설 무시하지 못할 호재 중의 호재 에속한다. 그럼에도 븮왕건의 편지븯에선 그러한 내용을 유추할 단서조 차 없다. 이것은, 결국 견훤의 왕비 겁간, 비첩 윤간은 허구였 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파악된다.그렇다면 뛝,뛞은 동시대 기 록의 전거조차 없이 가필된 내용으로서, 그 신뢰성에 깊은 의 문을던지지않을수없다. 왕건의 서한에서 적시하지 않은 ‘겁간 및 윤간 사실’이, 가 필되어 적나라한 필치로 묘사되었다면, 결국 븮삼국사기븯는 일 어나지 않은 사건을 두고 견훤의 죄상을 확대, 날조, 가필한 셈이 된다. 견훤이 왕비를 겁간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견훤조 한 것 으로 모자라, 부하들을 풀어 경애왕의 첩들을 겁간, 유린하였 다는븮삼국사기븯기록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애왕4년11월조은 일면악독함마저엿보인다. 한 가지 첨언하면, 927년 경애왕의 사망 시 연령은 최대 30 대초반을넘어서지않았다.박순교,<신라景哀王죽음과 관련한 몇 가지문제― 븮三國遺事븯 기록을중심으로 ―>, 븮택민국학논총븯16, 2015.p. 51의주61 따라서 경애왕 왕비의 연령 역시 30대 초반을 넘어서 지 않았을 것이다.당시 견훤은 이순(耳順)의 나이였다.븮삼국 사기븯의 서술과 문면(文面)은 춘추필법의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것일까. 가-2)-1 於是時也, ①景哀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 出遊鮑 石亭, 置酒燕갹, 不知甄萱之至, ②與夫門外韓擒虎븡樓頭張麗 華, 無以異矣. ③若敬順之歸命太祖, 雖非獲已, 亦可嘉矣. 向若 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則必覆其宗族, 害及于無 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籍郡縣, 以歸之, 其有功於朝廷, 有德於生民, 甚大. ④昔, 錢以吳븡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 新羅功德, 過於彼遠矣. ⑤我太祖, 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⑥ 而顯宗自新羅外孫, 卽寶位, 此後繼統者, 皆其子孫, 豈非陰德 之報者歟!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敬順王史論 가-2)-2 論曰: ①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 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②甄萱, 起自新羅之 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췄都邑, 虔劉君臣, 若禽蓬而草 姚之, 實天下之元惡大. ③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 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④雖項羽븡李密之雄才, 不能敵漢븡唐之興, ⑤而況裔븡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븮삼국사기븯50권열전10甄萱史論 위 두 자료는 븮삼국사기븯집필을 총지휘한 감수국사 김부식 의 사론(史論, 해당 기사에 대한 총평)이다. 이로써, [삼국사 기] 서술의 기본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김부식은 이른바 후 삼국 시대 주요 인물들, 왕건, 견훤, 경애왕, 김부 가운데 견훤 과 경애왕을 극도로 폄훼(가-3)-1 ①, 가-3)-2 ②, ③)한 반 면, 왕건과 김부에 대하여는 더할 나위없는 칭찬(가-3)-1 ③, ④,가-3)-2⑤)을퍼붓고있다 .김부는견훤에의해옹립되었다가4 년만인 931년 2월, 고창전투로 승세가 왕건에게 기울자 견훤을 배신했다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 5년 2월조). 이어 935년, 왕건에게 나 라와 백성을 바쳐 왕건의 장녀와 혼인, ‘국망여망(國亡與亡)’은 커녕 배신 이 가져다준달콤한 열매를맛보며호의호식으로 일관했으며,왕건사후 30년을더살며혜종,정종,광종,경종에이르기까지고려에서5명의왕이 바뀌는순간(978년4월4일)까지이승의영화를다하였다(븮고려사븯권2세 가2 경종 3년조). 견훤에 의해 옹립된 신라 괴뢰정권의 수장(권지국사)으 로 8년간, 고려인으로는그보다다섯곱절이나더긴43년을살다간자이 기도했다. 首丘初心이란말이 무색하게, 김부의장지(葬地) 또한 서라벌 일대가아니었다. 그의실묘(實墓)는황해장단부(長湍府)남쪽8리(현경 기 연천 고랑포)에 있다. 이것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가 신라, 신라의 백 성보다는 고려를 우선했던 삶의 궤적의 실증이다. 이렇다 할 전투 한 번 없이 나라를 통째로 들어 바친 김부의 존호가 경순(敬順), ‘순종하다’ 라 는사실은마찬가지전투한 번없이 나라를바치고호의호식을다한 유비 의아들유선(촉나라망국의군주)의선(禪),‘선양하다’와일맥상통하다는 점은흥미로운사실이다. ‘이신벌군(以臣伐君, 신하로서 임금을 방벌함)’의 원죄가 있건만 후삼국을 통일한 역사의 승리자인 왕건은 천지의 덕 을 온전히 갖춘 군자로, 김부에 대하여선 천명을 알고 나라를 바쳐 민생을 구한 지혜로운 이로 묘사하고 있다. 김부와 마찬 가지로 견훤 역시 왕건에게 귀의했건만 견훤에 대해선 천하 의 불한당, 시랑(豺狼븡승냥이와 이리)으로, 온갖 악행과 패륜 (경애왕 왕비 겁간 등)을 저질러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무뢰배,원악(元惡)으로묘사하고있다. 왕건과 군사 동맹의 파트너였던 경애왕은 무능, 황음, 난정 의 대명사이자 주폭(酒暴), 나라를 망친 파락호, 망국의 군주 (가령진후주)로평가하고있다.그결과왕건은승천하는용, 견훤은발정난범,경애왕은미친개처럼묘사되어있다. 븮삼국사기븯는 경애왕과 견훤을 폄훼하기 위해, 수나라 장수 한금호(韓擒虎)에 포획된 남조 진(陳)의 후주(後主, 중국의 가장 용렬한 군주로 지칭되는 인물), 진 후주의 마음을 미혹 시킨 궁비 장려화(張麗華, 중국의 전설적인 요녀), 한나라 유 방과 자웅을 겨룬 서초패왕 항우(項羽), 당나라에 맞서 반란 을일으킨이밀(李密)등4명의문제적인물을거론하고있다. 븮삼국사기븯에서 전하는 대로 경애왕의 왕비가 경애왕과 짝 하여 황음일락을 더한 천하의 요녀였다고 치자. 陳의 後主븡궁 비 장려화의 커플만큼 세상에 악명을 떨쳤다면 경애왕 왕비 (그녀)의 이름이 사서에 거론되지 않을 리 없다. 경애왕과 왕비 를 陳의 後主ㆍ장려화의 커플과 비교, 상정하는 것부터 무리인데, 경애왕 이 왕비를 가까이 했다는 것, 함께 주흥을 즐겼다는 것부터 확인되지 않 는다. 927년 포석정에는 경애왕 왕비뿐 아니라 비빈이 모두 있었음이 확 인된다. 장려화와 필적한다는 그녀(경애왕 왕비)의 이름조차 없다 는 것은 그 비교가 심히 어그러짐을 드러낸 것이자,븮삼국사기 븯서술 자체가 부회의 선에 가까이 다가섰음을 짐작케 한다. 92 7년당시포석정에선연회가열렸었고,당시고혹적인후궁‘죽라(竹羅)’가 남산신과 더불어 춤을 추었다는 일각의 주장.(권오찬, 븮신라의 빛븯, 경주 시,1980.pp.339~340.)도있으나사적에선 전거를 찾을 수 없다. 더 욱 경애왕 4년 치세를 천착하여도, 경애왕에게서 황음을 짐작, 추찰할 만한 편린조차 찾을 수 없다. 경애왕과 마찬가지 4년 치세 의진지왕이 황음무도로 폐위되었으나, 실제난정과 관련한 일체의사실 이 보이지 않는 것(븮삼국사기븯권4 신라본기4 진지왕)과 기시감을 불러일 으키는대목이다. 경애왕 치세를 통틀어 왕건과 견훤의 전쟁에 깊은 관심을 보이거나 후당에의 견사 등 군사,외교 등의 기록만이 보일 뿐 이다. 까닭에 위 가-2)-1 ①의 ‘가지이황락(加之以荒樂, 여기에 황락을 더함)’은 합리성이 극히 결여되어 있다. 이렇듯, 감수 국사 김부식의 사필이 추략, 궤사(詭詐)함이 이루 말할 수 없 다면, 적어도 경애왕 죽음에 관한 한, 그와 연결된 븮삼국사기 븯의서술전반에깊은의구심을지니지않을수없다. 견훤의 서한 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견훤및븮삼국유사븯기이2후백제 견훤조의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한’,븡왕 건 의 서 한 븮 삼국사기븯권50 열전10견훤 및 븮삼국유사븯기이2후백제 견훤조의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서’ ,양 서한의 골자는 엄격히 다르다.견훤은 자신이 경애왕 을 죽이지 않았다며 고백하고 있고, 왕건은 견훤이 경애왕을 참수했다고주장하는극단의내용이다.경애왕의죽음에관한 기록은 크게 세 갈래이지만, 견훤의 강요 내지 직접적 살해가 있었는지 여부에 따라서는 두 가지(가-3) ①,②/가-3) ③)로 정리된다. 가-3) ① 견훤 경북 내륙 공격→견훤 고울부 침습→경애왕, 왕건에게 구원요청→경애왕의 주연→ 견훤의 서라벌 침입→ 경애왕의 이궁, 후궁도망→경애왕 체포→백제 軍中에서 견훤 에 의 해컴 or참수 가-3) ② 견훤 경북 내륙 공격→경애왕, 왕건에게 구원요청 →견훤, 고울부 침습→견훤 서라벌 시림 침습 →경애왕, 포석 정에 유행→ 의도적 삭제(언급 없음) or 후궁도망 → 백제 軍 中에拘致→견훤의강요에자진(핍살) 가-3) ③ 견훤의 설유→간신 준동→경애왕 훙변(시해자 미 상)→간신(경애왕 시해 관련) 도망→ 경명왕의 족제 김부 옹 립 븮삼국사기븯권50 열전10 견훤 및 븮삼국유사븯기이2 후백제 견훤조의 ‘견 훤이 왕건에게보낸서한’ 경애왕의 죽음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 불과 경애왕 죽음 직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첨예한 이해 당사자, 경애왕과 동시대인인 왕건과 견훤, 양자가 주고받은 서한의 문면(文面) 사이에는 팽팽한 간극이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견훤(가-3 ③)과 왕건(가-3)①), 누구의 말이 과연 진실이며 이치에합당한것일까. 왕 건 이 세 운 고 려 왕 조 에 서 편 찬 된 두 기 록 을 보 면 , 븮삼 국 사 기븯는 왕건의 입장과 진술(가-3)의 ①), 이른바 ‘견훤의 경애 왕 참수설’을 충실히 대변, 서술하고 있는 반면, 일연 개인이 집필한 븮삼국유사븯 박순교, 앞의 논문, 2016. pp. 86 ~87.<표2>의가- 2)는 븮삼국사기븯의 기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면서 경애왕을 참수하지 않았다는 견훤의 입장(가-3 ③)을 은연중 옹호하고 있다.박순교,앞의논문,2016.pp.87 ~ 88. 앞서 살핀 고창의 토호 김행 등은 견훤의 경애왕 시해를 사 실로 간주하여 고창 전투에서 왕건을 지지하여 후삼국 쟁패 의물줄기를바꾸었다. 그에 힘입어 왕건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928년 정월 왕건이 서한에서 밝힌 내용,이른바 ‘견훤의 경애왕 참수 설’이 고려 왕조에서 정설처럼 굳어진 마당에, 븮삼국유사븯는 독자적으로 다른 견해를 피력한 셈이며, 이는 더욱 주목되는 사안이아닐수없다. 견훤은경애왕죽음직후왕건에게보낸서한에서경애왕의 죽음에 관한 한, 자신의 답답한 심정과 결백을 격정적으로 토 로하고 있다.반면,왕건은 경애왕 죽음과 관련하여 견훤의 죄 악을 천명하며 몰아붙이고 있다. 견훤은 견훤 자신의 충고를 마다한 채 왕건이 유언(流言, 떠도는 소문)을 믿고 있다고 했 다. 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및븮삼국유사븯기이2후백제견훤조의‘견 훤이 왕건에게보낸서한’. 유언과 충고로 압축되는 해당 구절 역시, 직전 문장에 언급 된 경애왕의 죽음과 관련한 사안일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 다. 어쩌면 견훤은 유언의 생산, 확대의 과정 배후에 왕건을 의심하고있었는지도알수없다. 무릇 ‘선동과 유언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반박하려면 수십 쪽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며, 반박할 때면 사람들은 이 미 선동돼 있기 마련이다.’는 세간의 경구도, 이런 해석에 보 탬이 된다. 견훤의 서라벌 입성이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인 이 상, 견훤의 경애왕 시해라는 거짓은 얼마든지 왕건에 의해 적 절히 배합, 선전될 수 있었다. 특히 경애왕 죽음을 기화로 정 치적 이해득실을 철저히 고려했을 왕건과 견훤으로서는, 진 실을 호도하고 사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 음해, 세상에 유포하려 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를테면 경애왕의 죽음을 둘러싼상호선전전,비방전이난무했다고보인다. 그런 상황임을 고려할 때,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지 않았음 에도 왕건이 왜곡 피력했을 가능성,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고 서도 죽이지 않았다고 변명했을 개연성,견훤의 말대로 3자에 의해 경애왕이 죽었으며 견훤과 왕건이 주범을 알지 못했거 나 거꾸로 알았음에도 정치적 이유로 침묵했을 개연성 등 여 러경우의수를상정하여볼수있다. 견훤의 악행 중 으뜸으로 거론되는 ‘견훤의 경애왕 왕비 겁 간’역시 미심쩍다.경애왕,견훤과 동시대인인 왕건은 격문의 형태로 낱낱이 견훤의 죄상을 공박하였다. 하지만, 왕건은 정 작 대서특필해야 할 견훤의 경애왕 왕비 겁간 항목이나 경애 왕의 비빈에 대한 집단 윤간’에는 침묵하고 있다. 한데 븮삼국 사기븯는 왕건조차 언급하지 않은 견훤의 ‘왕비 겁간’, ‘비빈에 대한 집단 윤간’을 아무 근거도 없이 기정사실로 기록하였다. 혹여 견훤이 자신이 행한 죄과 그 이상의 형량을 지고 있는 것 은아닌지새삼검토할여지가있다.이는천년이상의오랜세 월에 걸쳐 국왕 시해, 혹은 겁간의 의혹을 벗지 못해 온 견훤 에게도, 겁간의 피해자로 운위된 ‘경애왕 왕비’ 자신은 물론, 그녀와 직븡간접적 가족 관계로 연결된 박씨 일문에게도 씻을 수없는해묵은마음의상처이기때문이다. 이른바, 견훤의 3대 거악, ①경애왕 시해, ②경애왕 왕비 겁 간, ③집단 윤간(비빈들을 대상으로 한)에 관한 담론은 새로 이검토의여지가남겨진셈이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13) Ⅰ.927년경애왕죽음과븮삼국사기븯기록의의혹 박 순 교 뱚Ⅱ.견훤의경애왕왕비겁간븡 비첩 집단윤간은허구 뱚Ⅳ.븮 삼국사기븯와븮삼국유사븯의서술 박 순 교 뱚Ⅲ. 븮삼국사기븯기록과김부식 목 차 Ⅰ.927년경애왕죽음과븮삼국사기븯기록의의혹 Ⅱ.견훤의경애왕왕비겁간븡비첩 집단윤간은허구. Ⅲ.븮삼국사기븯기록과김부식 Ⅳ.븮삼국사기븯와븮삼국유사븯의서술 Ⅰ.927년경애왕의죽음과븮삼국사기븯기록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