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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佛心印 扶宗樹教 大覺弘闡 曹溪嗣祖 願力受生 龍城祖師 震鍾碑銘 永嘉覺公、證道歌云、一超直入如來地、自利利他終不竭、生於末法、能秉慧劒般若鋒金剛燄、摧外道破邪宗、震法雷擊法皷、布慈雲灑甘露。作大丈夫漢者是誰、龍城禪師是其人也。 師俗姓白氏、貫水原、高麗名臣、忠肅公、諱莊之後裔、父諱南賢、母孫氏、世居湖南南原郡之竹林里、母夢異僧、著袈裟、入室中、覺而有娠、以李朝高宗甲子五月八日生師。 師生而有異、厭聞腥臭。黃口時也、隨其父釣魚、見生者、盡放之、六歲時也。 詠扇子詩曰、大撓八竹扇、借來洞庭風、又見村童摘花詩曰、摘花手裏動春心。是見其慧頭有來由、九歲時也。 欲出家禀父母、父母知其法器天成、許之。遂入伽倻山海印寺、依華月和尙、得度爲僧。仍徃義城郡之孤雲寺、參水月長老、問曰、生死事大、無常迅速、如何得見性、長老曰、去聖時遙、魔強法弱、宿業障重、難於排除、若至誠誦大悲心呪、則業障自滅、心光透明。師禀教、不撤誦呪。 遊方至楊州之普光寺兜率菴、倍加精進。忽又自疑、山河大地、萬象森羅、皆有本源、所謂人者、以何爲根、又我此見聞覺知之根在甚麽處、我之心念、從何而生。如是起疑、至第六日、一念子、如桶底脫相似。不可曰議而心思、十六歲時也。 至金剛山表訓寺、謁無融禪師、具述前緣。融問曰、能知一念子、如桶底脫相似者、是甚麽物。師黙而不答、融曰、不道不是、更參話頭始得、師自是更參狗子無佛性話、十七歲時也。 復歸普光寺兜率菴、忽然失笑、古云、去年貧、未是貧、無立錐之地、今年貧、始是貧、錐也無、正謂此之境界。二十歲時也。 於梁山郡通度寺之金剛戒壇、師禪谷律師、受比丘戒及菩薩大戒、二十七歲時也。 於曹溪山松廣寺之三日菴、夏安居時、披閱傳燈錄、至黃蘗法語、月似彎弓、少雨多風處、忽然打失鼻孔 馬祖日面佛月面佛話、及趙州無字話、意旨煥然明白。 乃作偈曰 金烏千秋月 洛東萬里波 漁舟何處去 依舊宿蘆花 初悟再悟、乃至三悟、是皆師之自利事也。 師以辛亥始來京城。其翌年禪宗梵魚寺、於大寺洞、創立禪堂、請師主法師。慨然就之、每日曜說法、擧揚宗旨。京城士女、始得聞心地法門、莫不讚歎師之法道高明、四十九歲時也。 後師於鳳翼洞、自營殿堂顔曰、大覺弘闡玄風。兼譯佛典、如首楞嚴經、起信論、金剛般若經、圓覺經、華嚴經、梵網經、及禪門撮要等、諺文刊行、廣宣佛教。五十八歲時也。 自壬戌至辛未十年之間、以放生爲事、是則師之利他事也。 師一日看經次、忽自左齒間出紫黑色舍利一粒、形如佛頭、色亦光潤、六十一初度時也。 庚辰、二月、師忽示疾、凡三日間、爲信男女晝夜說法。又囑門徒等曰、吾滅度後、汝等莫作世情悲泣穿孝、但誦無上大涅槃圓明常寂照則足矣。至二十四日、日出時、微笑入寂、世壽七十七、僧臘六十一。 師之法嗣、寔有多人、而東山慧日是余內姪。而寓余家學西醫、高宗壬子於大寺洞禪堂、偶聞師所說法警策人認主人公之語、慧於言下、頓悟宿緣、發菩提心。遂盡棄其學、而決意出家。癸丑於梵魚寺之金魚禪院、以師爲師v得度受戒。遊方求法、不怠參學。 師遷化來京、收拾師之法語。將刊印公諸世、又與同門諸人欲立塔碑海印、以報師恩。撰師行狀、來乞余銘。余旣嘉尙其志、又知師最深義、不敢辭、乃綴其狀。 而爲之銘曰 南巡遍參善知識 西來單傳上乘禪 殺活由意劍在手 魔外落膽雷震天 楊柳春風黃鳥語 蓼花秋水白鷗眠 萬丈靑烟朱海底 一輪紅日下山邊  世尊應化二千九百六十八年 辛巳 暮春 上澣 葦滄居士 吳世昌 謹撰。 출처 : 백용성 대종사 총서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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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불심인 부종수교 대각홍천 조계사조 원력수생 용성조사 진종비명 영가 각공의 〈증도가〉에 이르기를,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서,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다함이 없도다). 말법 세상에 태어나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았으니, 반야의 칼날 위에 금강의 불꽃이 일도다. 그것은 다만 외도의 마음을 꺾을 뿐 아니라 삿된 가르침도 깨뜨리도다. 법의 우레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자비의 구름을 펴고 감로수를 뿌리도다”라고 하였다. 과연 이 대장부라고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용성 선사 바로 그 사람이다. 용성 선사의 속성은 백씨이고, 본관은 수원이며, 고려의 명신인 충숙공 장의 후예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남현이고, 어머니는 손씨이며, 대대로 전라도 남원 죽림리 에 살았다. 어머니가 어느 날 비범하고 기이한 승려가 가사를 입고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스님을 잉태하였다. 그리고 조선 고종 갑자(1864)년 5월 8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비범함이 있었으며, 비린 냄새를 맡는 것을 싫어하였다. 아주 어린아이)때 아버지가 낚시하는 데에 따라가서, 잡아놓은 물고기 중에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다 놓아주었으니, 스님의 나이 6살 때 일이다. 글재주도 뛰어나서 ‘부채’를 시제로 하여 “팔죽선을 크게 흔들어 동정호의 바람을 빌려오리라”라는 시를 지었으며, 또 시골아이가 꽃을 따는 것을 보고는 “꽃을 따자 손 안에서 봄의 기운 꿈틀대네”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는 혜두가 일찍부터 그 유래가 있음을 보인 것이니, 스님의 나이 9살 때 일이다. 스님이 출가하고자 부모님께 아뢰니, 부모님께서는 그 타고난 법기 를 아시고, 결국 허락하였다. 드디어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서 화월 화상에게 의탁하여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어서 의성군 고운사로 가서, 수월 장로를 참례하고 묻기를 “생사는 중대한 일이며 세상은 덧없고 빨리 변하는데 어떻게 해야 불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장로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가 오래되어, 마가 강해지고 법은 약해졌으며, 숙세의 업장이 무거워져서 이를 제거하기 어려우니, 만약 정성을 다하여 대비주 를 외우면, 자연히 업장이 소멸되고 마음이 훤히 깨닫게 될 것이니라”라고 답하였다. 스님이 그 가르침을 받고, 그로부터 밤낮없이 대비주를 외웠다. 그 후 여러 지방을 유행하다가 양주 보광사 도솔암에 가서 더욱더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문득 의심하기를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은 모두 근원이 있는데, 그렇다면 소위 인간이란 무엇에 근본한다는 말인가?’라 하고, 또 ‘나의 견문각지 의 근본은 어디에 있으며, 나의 이 생각은 어디로부터 생겨났는가?’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의심을 품은 지 6일째 되는 날에 의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한 생각이 마치 물통의 밑바닥이 빠지는 것 처럼 툭 빠져서 환히 깨닫게 되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생각으로 미루어 헤아릴 수도 없는 미묘한 것이었으니, 스님의 나이 16살 때 일이다. 스님은 금강산 표훈사에 가서, 무융 선사를 찾아뵙고, 이전에 경험했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자 무융 선사가 묻기를 “한 생각이 마치 물통의 밑바닥이 빠지는 것과 같음을 알았다고 한 주체는 바로 무엇인고?”라고 물었다. 그러나 용성 스님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무융 선사가 말하길 “그 깨달음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다시 화두를 참구하여서, 바른 깨달음을 얻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용성 스님은 이로부터 다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라는 화두를 참구하였으니, 스님의 나이 17세 때 일이다. 스님은 다시 보광사 도솔암으로 돌아와서 수행을 하였는데, 어느 날 문득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하길 “옛말에 ‘작년 가난은 가난도 아니라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금년 가난이 진짜 가난이라 송곳마저 없구나 라고 한 말이 바로 이 상황을 이른 것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이는 스님의 나이 20세 때 일이다. 스님은 양산군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선곡 율사로부터 비구계 와 보살대계 를 받으니, 스님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다. 순천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에서 하안거를 할 때에 『전등록』 을 보다가, 황벽 선사의 법어 중에 “달은 활처럼 휘어 있고, 적은 비에 바람은 많네”라는 구절에 이르러, 홀연히 단박에 깨달았다. 그리하여 마조 선사의 ‘월면불도 일면불 이라는 화두뿐만 아니라, 조주 선사의 ‘무자화두에 이르기까지, 그 뜻이 모두 환하게 이해되고 분명해졌다. 이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금오산에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에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이배는 어디로 갔는고 여전히 갈대꽃에서 머물도다 스님의 첫 번째 깨달음 두 번째 깨달음 세 번째 깨달음 은 모두 스님의 자리에 대한 일이었다. 스님은 신해(1911)년에 처음으로 경성京城으로 왔다. 이듬해 선종 범어사에서 대사동(인사동)에 선당을 창립하여 스님을 법사로 초청하였다. 개연히 그 직책을 맡아 매주 일요일마다 설법하여, 불교의 깊은 가르침을 받들어 널리 전하였다. 이에 경성의 사람들이 비로소 심지법문 을 듣게 되어, 스님의 법도가 고명하다고 찬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는 스님의 나이 49세 때 일이다. 그 후에 스님은 봉익동에 스스로 전당을 열어 대각 이라고 하고, 선종의 깊고 오묘한 도를 널리 알렸다. 그리고 스님은 불교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수능엄경』·『기신론』· 『금강반야경』·『원각경』·『화엄경』·『범망경』·『선문촬요』 등과 같은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간행하여서, 불교를 널리 전파하였다. 이는 스님의 나이 58세 때 일이다. 임술(1922)년부터 신미(1931)년까지 10년 동안은 방생하는 일에 힘썼는데, 이는 스님이 이타를 행한 시기였다. 스님이 하루는 경전을 보는 중에 홀연 왼쪽 치아 사이에서 자흑색의 사리舍利 한 알이 나왔는데, 모양은 부처님의 머리와 닮았고, 그 색 또한 광택이 났다. 이는 61세, 환갑 때의 일이다. 경진(1940)년 2월에 스님이 갑자기 병에 걸렸는데, 3일 동안이나 신도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설법하였다. 그리고 문도들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입적한 후에 너희들은 속세의 인정에 사로잡혀 슬퍼하거나 울지 말고, 상복도 입지 말아라. 다만 ‘무상대열반 원명상적조’ 라는 구절만 암송해 준다면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2월 24일 해가 뜰 즈음에 미소를 띠며 입적하였으니, 세수는 77세였고, 승랍은 61세였다. 스님의 법통을 이어받은 제자는 실로 많이 있는데, 그 중에 동산 혜일은 나의 처조카이다. 그는 나의 집에 머물면서 서양 의학을 배웠었는데, 고종 임자(1912)년에 대사동(인사동) 선당에서 용성 스님의 ‘사람을 경책 하여 주인공임을 깨닫게 한다)’는 말씀을 우연히 듣고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전생의 인연을 단박에 깨닫고 보리심을 일으켰다. 이에 그동안 배운 학문을 전부 버리고, 출가하기로 결의하였다. 계축(1913)년에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용성 스님께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그 후 여러 곳을 다니며 불법을 구하였고,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용성 스님이 입적하시자 경성으로 와서, 스님의 법어를 모으고 정리하였다. 장차 문집을 간행하여서 세상에 알리고, 또 용성 스님 문하의 사람들과 함께 해인사에 탑을 세워서,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명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그 뜻이 가상한데다가, 또 용성 스님의 가장 깊은 뜻을 잘 알기 때문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글을 짓는다. 그 명문은 다음과 같다. 남쪽으로 가서 선지식을 두루 참례하고 서쪽에서 왔던 상승선을 홀로 전하였네 살활의 방편을 손안의 검같이 뜻대로 하니 가 천둥과 벼락에 깜짝 놀라듯 하네 버드나무의 따뜻한 바람에 꾀꼬리 노래하고 여뀌 꽃이 핀 가을 물에 흰 갈매기 잠들었네 만 길 푸른 연기 붉은 바다 밑으로 사라지고 둥글고 붉은 해는 산언저리로 뉘엿뉘엿 지네 세존응화 불기 2968년 신사(1941)년 늦봄 상한 에 위창 거사 오세창 삼가 짓다. 출처 : 백용성 대종사 총서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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