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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합사된 휘 擎立(격립)이 공의 11대조이다. 아버님은 휘 道銓이요 어머님은 남평문씨 光昊의 따님인데 서기 1902년 동래 미남에서 출생하니 어릴적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가문의 촉망을 받았고 동래고보에 진학함에따라 왜제에 대한 항거와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을 마음속에 다짐하게되었다. 1919년 2월말 서울에서 밀파된 곽상훈 등의 지령을 받은 공은 동기졸업반 엄진영, 김귀용및 하급생 김인호등 20여명과 함께 거사에 착수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3월 13일 동래장날 정오를 기다렸다. 그날이 오자 동고생 약200명은 2대로 나누어 군청앞과 남문에 집결했는데 왜헌병의 습격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할 겨를이 없이 바로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삽시간에 수천의 군중이 합세하여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헌병 보조원과 경찰관중에 모자와 정복을 벗어던지고 시위에 가담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증파된 헌병과 경찰의 실탄사격으로 많은 시위주동자가 검거되었고 혹독한 고문끝에 학생은 24명이 실형을 언도받았다. 공은 6개월 징역에 만기출옥후 1930년부터 모교에 서무담당겸 수학교사로 근무하다가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진학하여 방적을 전공하고 졸업후로는 양산산업조합에 취업하여 은밀히 항일운동을 벌이던 중 몽상에도 그리던 조국해방을 맞이하였다. 한독당 양산지부장을 맡아 정치활동을 벌렸으나 6.25사변으로 정계에 환멸을 느껴 자녀교도에만 전념하다가 1990년 향년89세로 서거하니 묘는 강원도 원주 손곡리에 있다. 부인 양서경 여사는 婦德母儀(부덕모의)를 갖추어 내조의 공을 다했으며 공보다 18년 앞에 별세하니 묘소는 팔송리시립공원묘지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니 남에는 在永,在馥이요 녀는 貞順이며 사위는 乙永이다. 오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