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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朴載赫 1895~1921 왜놈 손에 죽임을 당하느니 오히려 내손으로 목숨을 꺾어 버리겠다. - 박재혁 의사 옥중 말씀 중에서 - 1895년 5월 17일 경상남도 부산부 범일동 183번지에서 아버지 박희선과 어머니 이치수의 1남 1녀, 독자로 태어나 부산진사립육영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를 거처 부산공립상업학교(부산상고, 현 개성고)에 입학하였다. 박재혁은 부산진사립육영학교 재학 중, 교장 김상하 외 최천택, 김영주, 백용수 등 75명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최천택, 김병태, 박홍규 등과 동국역사 책 등사 배포사건으로 주모자 박재혁 등은 일제 경찰에 불온학생으로 낙인찍혔으며, 이듬해 비밀결사인 '구세단'을 결성 후 활동 적발로 일제 부산경찰서에 구금되는 등 학창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부양과, 독립운동에 기여하기 위하여 친척 박국선이 경영하는 경북 왜관역전의 곡물무역상에서 일을 하다 상해와 싱가포르를 오가며 인삼 등의 무역업을 하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1920년 4월 의열단에 입단,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부산경찰서장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박재혁은 폭탄 한개와 거사비용 등을 가지고 상해에서 일본을 거쳐 부산으로 넘어와, 같은 해 9월 14일 오후 2시 40분경 부산경찰서로 들어가 하시모토 서장 앞에서 폭탄을 터뜨렸으나 하시모토 서장은 경상, 박재혁은 중상을 입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21년 경성고등법원에서 원판결 무기징역은 취소되고 사형이 확장되었으나, 대구감옥에서 복역 중 왜놈 손에 죽기 싫다며 옥중 단식을 하다 순국하였다. 1962년 3월 1일 박재혁 의사에게 건국훈장 단장(현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69년 박재혁의사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12년 8월 14일 부산동구청은 범일동 조방로 630m 구간을 박재혁 거리로 명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