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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수는 부산(釜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29일 부산 동래(東萊) 구포(龜浦) 시장에서 면민 1천 2백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구포는 낙동강 좌안에 위치하여 부산·김해·양산·동래에 접한 요충지대로써 고래로부터 상업이 번창한 곳이었다. 이곳에서의 만세운동은 부산과 동래의 만세소식을 접하면서 시작되었고, 3월 중순 경성의학전문학교 생도인 양봉근(楊奉根)이 구포로 내려오면서 구체화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구포 장날인 3월 29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정하고, 3월 27일과 28일에는 거사에 필요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밤을 세워 인쇄·제작하였다. 거사 당일날 이들은 구포시장에서 장꾼 1천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런데 이 때 11명의 인사가 일경에 붙잡히게 되자, 김달수 등 젊은 청년은 붙잡힌 인사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금 대오를 정비하여 1천 2백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면서 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주재소로 돌진한 청년들은 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의자와 책상 등 집기를 부수면서 구금된 인사들을 구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무자비한 총격에 의하여 수많은 인사들이 다치고, 김달수는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7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