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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동원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를 침공한 후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위안소'를 설치하고 조선인은 물론 중국.타이완.동남아시아.태평양지역 현지 여성과 동남아시아에 거주하던 백인 여성에게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1932년 1월 상하이 上海 '위안소' 설치 이후 일본군 '위안부' 동원지역을 일본군 주둔지 전역으로 확대하였으며, 이에 따라 여성들은 취업사기, 협박 및 폭력에 의한 동원, 인신매매 및 유괴 등의 방식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동원은 주로 일본 국가권력이 민간업자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본 정부의 일본군은 '위안소' 운영업자를 선정하였고, 동원과저어에 협조하였으며, '위안소' 운영에도 관여하였다. 기업 '위안부' 1938년 이후 일본 탄광 등지에서 노무관리의 일환으로 기업 '위안소'가 등장하였는데 기존의 특수음식점 등을 활용한 경우가 많았다. 홋카이도탄광기선주식회사는 '위안소'를 설치하는 등 경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 미쓰비시 소속 기업이 '위안소' 개업을 허가한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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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자 및 군무원동원 일제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데는 군인뿐만 아니라 노무자와 군무원 등의 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였고, 인력 규모는 군인의 십수 배에 달하였다. 노무자는 동원 경로에 따라 국민징용(1939.10~1945.4), 할당모집(1938.5~1945.4), 관官알선(1942.2~1945.4) 등으로 나누어진다. 일제는 미성년자와 여성 노동력 또한 토건공사장 등 각종 작업 현장에 광범위하게 동원하였다. 1944년 들어서는 여자근로정신대를 조직하여 군수공장에서 소녀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이 밖에도 각종 근로보국대를 조직하여 미성년자.노인.학생.직장인을 수시로 동원하였다. 군무원은 군에 고용된 민간인으로 크게 군노무자와 기타 군무원[포로감시원, 교환원, 운전수, 간호부 등]으로 구분된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군노무자는 징용과 현지채용 방식으로 동원되었으며, 군요구에 따라 현지에서 노무자가 군무원으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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