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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2월31일 일요일 12 (제132호) 기획 ▲솔일재연혁 솔일재는 대사헌공(휘 ·號 歸林)이 벼슬을 사 퇴(辭退)하고 청주 계림촌에 은거(隱居)하시다가 다시 경산 내매리로 이거하시어 천년(天年)을 마 치시니 인근 천법산(天法山)에 장사(葬事)지내었 다. 그 후(연대미상) 천법산 아래 시지동에 환주와 즙(丸柱瓦葺) 3間의 재사(齋舍)와 3칸의 포사를 건립하여 묘사시(墓祀時) 참제원( 핫祭員)의 재숙 소로사용하였다. 그러나 1995년 도시계획으로 도로에 편입됨으로 서 불가항력으로 1995년 4월 8일에 철거하게 되어 부득이 그 터에 재사를 중건신축하고 남은 터에 3 층양옥을건축하여회관과관리사로하고2년여의 공정에제반공사를거쳐1998년 4월 30일 낙성식을 거행하게되었다. △ 위치 :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지동 107번지(천 을로 62).대지 :363㎡ ▲솔일재재호(齋號) 솔일재(率一齋)의 재호는 ‘한곳으로 모은다.’는 의미를담고있다.즉솔일(率一)은한집안의인심, 나아가 천하의 인심을 한곳으로 모은다는 것으로 대사헌공파의 후손들은 이곳 솔일재를 중심으로 문중의 근간(根幹)을 삼는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재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솔일재 기문일 부를인용해본다. [‘주역(周易)’의 췌괘(萃卦)와 환괘(渙卦)에 모 두 이르기를 ‘왕이 사당을 둠에 지극하도다(王假 有廟)’라고 하였는데 사당이라는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손자의 정신(精神)이 서로 모이는 곳이다. 그래서 천하의 人心을 모아 흩어지 는 것을 유지(維持)시키는 방법으로 사당을 지어 ‘정신을 한곳으로 모으는’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집안이나 나라가 없다면 그만이겠으나 있다면 그 렇 게 하 기 를 그 만 둘 수 없 는 것이다. 한 집안이나 국가는 크고 작은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그 방법은 동일하며, 사당과 재실(齋室)은 안팎이 비록 다르 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같은 것이니 이것이 응천 (凝川, 밀양의 다른 이름)박씨가 그들의 선조 귀림 공(歸林公)을 위하여 산소 곁에다 솔일재를 짓게 된 까닭이다........(이하 줄임)] 註 ☆췌괘(萃卦)-육십사괘(64卦)의 하나.곧 곤 하(坤下), 태상(兌上)으로 이루어졌으며, 만물이 한데모이는상(象)임. ☆ 환괘(渙卦)-64괘의 하나, 곧 감하(坎下), 손상 (巽上)으로이루어졌으며,만물이흩어지는 상임. ▲대사헌공파약사(略史) 대사헌공파 파조의 휘(諱)는 해, 호(號)는 귀림 (歸林)으로 조선 초 대사헌을 역임하여 관직을 따 대사헌공파라한다. 선대를 보면 밀성대군의 15世 支孫(시조后44世 孫)으로 고려 충목왕(忠穆王, 1344~1348년) 때 문 과에 급제하여 평장사(平章事) 중서령(中書令)을 역임하고, 공민왕(恭愍王, 서기1351년~1374년)때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란(紅巾賊亂)을 평정 공 민왕14년(1365)에 숭록대부 문하시중과 보문관대 제학(寶文館大提學)에 오르고 녹훈(錄勳)으로 보 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輔理功臣 大匡輔國 崇 祿大夫)를 추증(追贈)받고 밀직부원군에 봉해진 시호 문숙공인 휘 중미(中美, 호 竹隱)의 차자(次 子)이다. 조부의 휘는 진록(晉祿, 號 菊磵)으로 포은 정몽 주 선생과는 도의(道義) 교유(交遊)가 있어 정 선 생이 시(詩)를 지어 포장하고 칭송하였으며, 대제 학을지내부자가대제학을지낸명문가이다. 대사헌공은 1347년(충목왕 3년)에 태어나 30세 가 되던 1377년(우왕3)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러 왕의 명령에 응 하여 그 뜻을 일반에게 선양(宣揚)하고 흉금(胸 襟)을털어놓고큰계책을펴도록성의껏인도하기 를극진하게하지않은바가없었으니곧기강이바 로 세워졌다. 그리고 대사헌으로서 장래가 촉망받 는 위치에 있음에도 공명을 멀리하고 전원으로 돌 아갈 생각이 간절하여 글을 읊고 전원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여 청주 계림촌으로 우거한 것을 보면 결국 자연으로 돌아온다는 귀림(歸林)을 자호(自 號)로 한 연유이기도 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 다 . 이후 다시 영남의 경산현 고산방(孤山坊) 내매 리(內梅里)로 이거하여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고 졸하여 유택은 천법동(시지동 산11번지) 유좌(酉 坐)에있다. 문중의 역사를 상고(詳考)해 보면 세거지를 옮 길때주로선조님과인연이있는곳이나스승과교 유하는 벗, 그리고 혼인관계로 나누어지는데 대사 헌공의 경산 내매리의 입향은 아버지의 유택과 사 패지가 있는 청도와 가까운 거리이고, 처가(妻家) 옥산전씨와 동서(同壻)인 아산장씨(蔣興膚)와의 인연으로인한것으로추측해본다. 이로인해 ‘옥산전씨’, ‘아산장씨’, ‘밀양박씨’ 세 가문은 삼공(三公)의 유지승계를 위한 강선계(講 先契)를 맺어 600여년을 이어 매년 음력 4월 10일 을 기해 삼(三) 선생의 위대하신 업적을 추모하며 후손간친목을돈독히해오고있다. 대사헌공은 옥산전씨와의 사이에 아들 울(蔚)을 두었는데 통훈대부 행 단성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계조(繼祖), 승조(承祖), 사조(嗣祖), 찬조 (纘祖), 순조(順祖), 현조(顯祖) 등 6형제를 두고 이 들이각각대·소과에등과하면서크게번성하였다. △ 장자 계조(繼祖)는 진사로 안의현감을 지내 고 사형제를 두었으나 그 이후 후손이 번성하지 못 하고, △ 二子 승조(承祖)는 생원으로 사정에 이르 렀으나형과같이무후(无后)이다. △ 三子 사조(嗣祖)는 통훈대부 행 과천현감으 로장남 신손(愼孫)또한현감으로,이온(而溫),이 량(而良),이공(而恭),이검(而儉),이양(而讓),이 득(而得)등 6형제를 두었으나 이중 넷째까지는 무 후(无后)이고 다섯째 이양(而讓)은 군수를 역임하 였다. 증손 매헌공 휘 응성(應成)은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관을 역임하고 과만(瓜滿)하여 막 고향에 환고 하였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장성한 아들 삼형제와 함께 전투에 참전하여 송암 김면 장군과 같이 의병을 지휘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군인의 본분을다한후4부자가장렬히순국하시니선조임 금께서 가상히 여기시어 10살 된 막내아들에게 임 금왕변(王)의 옥이름 선(璇)자를 사명하시고 해남 현감에 제수하였으며, 매헌공에게는 선무원종공 신 1등을 책록하였다. 경산(현 시지동) 옥수골 산 성을 박장군 산성이라고 구전되고 경산읍지에 등 재되어 전해온다. 대사헌공의 실질적인 맏집이 된 과천현감공(휘 사조)의 주손은 경산 시의원을 지 낸 박해동이고, 그의 증조부(휘 시오)는 솔일재를 중창하고치산석물등주손으로서소임을다했다. △ 四子 찬조(纘祖)의 호는 국파(菊坡)이고, 정 종 기묘(1399년)에 태어나 1447년 대사헌공 후예 로서는 첫 번째 문과(병과2위) 급제하여 청송부사 와 예문관 봉교, 세종실록편찬 도청 당상을 거쳐 세조 1년 원종공신 2등으로 녹훈되어 성종 18년 사 재감정, 성종20(1489) 종부시정이 되었다. 증손 휘 현도(顯道)는 사마시에 입격하여 군수를 지냈고, 그의 손자 돈암공 휘 이효(以孝)는 정유재란에 큰 공을 세워 군자감정을 역임하고 사란(四亂) 충의 록과 영천읍지에 등재되어 전해지고 있다. 돈암공 의 6대손 상회(尙檜)는 세수(歲首) 92세로 의금부 도사에 증직되고, 그의 부(父) 일심당공(휘 萬一) 은 증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 조부(휘 世慶)는 증 통정대부공조참판으로3대추증되었다. △ 五子 순조(順祖)의 호(號)는 국청헌(菊淸軒) 으로 현감이고, 아들 諱 영손(英孫)은 문과에 급제 하여 홍문관 교리(校理)와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歷任)하였다. 풍천군수(豊川郡守) 재직시에 「청렴결백(淸廉潔白) 하기가 빙옥(氷玉)과 같이 한 점의 흠이 없다.」는 말을 듣고 직지사(直指使, 암행어사)가 포상(褒賞)을 상주(上奏)하여 임금 께서 가상(嘉尙)하게 여겨「청풍당(淸風堂)」이라 고 사호(賜號)하였고 돌아가신 후에 도승지로 추 증되었다. 청풍당공(휘 영손)의 장자 빈은 참봉이고 그의 증 손 천 기 (天 紀 )의 호 는 치 옹 ( 勖翁)으로 장자 묵 (默)은 임진왜란에 유명을 달리했고 그의 아들 증 효(曾孝)의 호(號)는 세심당(洗心堂)으로 당대의 거유 여헌 장현광 등과 교유하며 문행(文行)이 뛰 어났다. 치옹공의 차남 점(點)의 호는 양호당으로 임진왜란 뒤 임고서원 초대원장을 지내고 한강 정 구선생과 도의로 교유하는 등 아들 문효와 함께 학 행이뛰어났다.양호공의 증손성세(聖世,호석연) 은 문과 병과3인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정을 지내 고 향리로 돌아와 후학양성에 매진하였다. 삼남 정 (珽)은 집경전(경주에 있었던 조선 초기 '태조 이 성계'의 어진을 봉안하던 전각) 참봉, 그의 아들 윤청(允淸)은 의성교수, 손자 린은 예빈시 참봉, 증손의 諱는 사신(士愼)으로 호(號)는 죽재(竹 齋)인데 진사(進士)로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영 천성을 수복한 공적과 그 학행은 사란창의록(四亂 倡義錄)에 실려 있고, 돈령부 도정(敦寧府 都正) 으로 九十三세(歲) 향수(享壽)하였으며 그 학행 (學行)은 주지(州誌)에 실려 있다. 또, 대암공(大 庵公, 휘 성 화령군 7대손)과는 족종간(族從間)이 라 계자(季子) 매산(梅山)公 민수(敏修)를 출계 시켜 사자(嗣子)가 되었기에 정분이 돈독하였고, 노계 박인노 선생과는 종반(宗班)간이다. 5대손 오졸자(吾卒子) 諱 돈(暾)과 국담공(菊潭公) 諱 현(睍)은 더불어 지산(芝山) 曺선생에게 수업(受 業)하셨고 또 대암(大庵)선생의 사자(嗣子) 숙제 (叔弟) 諱 민수(敏修)와 같이 한강정(寒岡鄭)선 생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하였다. 그리고 국담공 은 진사로서 장사랑(將仕郞)에 유일천(遺逸薦)하 셨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 창우(昌宇) 의 號는 괴천으로 사마시(司馬試)에 올랐으나 영 달을 멀리하고, 올바른 군주(君主)의 길을 제시하 는 등 강직한 성품을 가졌으며, 온화하게 가정을 이끌어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참다움을 보이기도 하였다. 1664년 봄에 울산 사림의 청원(請願)과 이휴정 이동영 공(公)의 권유로 누대를 살아온 영천을 떠 나 울산 신계리로 이거하여 울산의 예사(禮師)가 되어 상무(尙武)의 기풍(氣風)이 강한 울산지역의 선비들을 교화(敎化)하여 유풍을 진작시키는데 크 게공헌한학자가이기도하다.그리고그의후손고 헌공 휘 상진은 대한광복군 총사령으로 대한민국 의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어 울산의 인물로 추앙 받고있다.그리고오졸자선생의9대손소진(昭鎭, 일명 文瑞)은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임시정부 구제 총회장, 독립선봉대 총대장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 동사에큰획을그었다. 죽재공과 종반인 노계 박인노 선생은 의성교수 를 역임한 휘 윤청(允淸)의 차남 석(碩)의 아들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 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別侍衛: 조선 시 대, 오위의 하나인 용양위에 딸렸던 장교 부대)가 되어왜군을무찔렀다.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 막하로 종군하였고,1598년 왜군이 퇴각할 당시 사졸(士卒)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가사 태평 사(太平司)와선상탄을지었다. 이듬해인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 將), 선전관을 지내고 이어 조라포(助羅浦: 거제도 현재 구조라) 수군(水軍) 만호(萬戶)로 부임하여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 워졌다.뒤에사직하고,고향에은거하며독서와시 작(詩作)에전심하여많은걸작을남겼다.? 1630년(인조 8) 노인직(老人職)으로 용양위 부 호군(龍 웹衛副護軍:조선시대의중앙 군사조직인, 5위에 속했던 종4품의 무관 관직)이 되었다. 그가 남긴 중요한 작품으로는 누항사(陋巷詞), 선상탄 (船上歎)등이 있으며, 도학(道學)과 조국애·자연 애를 사상적 바탕으로 천재적인 창작력을 발휘하 여 전쟁 중에서도 시정(詩情)과 우애가 넘치는 작 품을 썼으며,무인다운 기백과 신선미로서 화려 웅 장한 시풍을 이룩했다. 송강 정철을 계승하여 가사 문학을 발전시킨 데 공로가 있으며 시조 60여 수를 남겨 우리나라 시가문학의 선구자로서 국문학사 에끼친공적은천고(千古)에빛난다. 청풍당공의 넷째 휘 숙(琡)의 號는 청강(晴江) 으로 승사랑, 그의 아들 윤화(允和)는 효행으로 선 능참봉에 제수되었고 그 기록이 영천군지와 삼강 록에전해진다. 청풍당공의 다섯째 휘 유 는 무 과 에 급 제 하 여 어 모장군행좌부장을역임했다. 대사헌공의 후손으로는 국청헌공(휘 順祖)의 후 손들이 제일 번성하여 과한과 문한이 뛰어나고 협 부하여 혼맥과 범절로 도내에 명성을 얻었다. 조선 조 대과 6명, 생원진사 8명과 문집을 간행한 무수 한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근세에 이르러 청풍당공 의 18대종손 박기락은 청풍당실기와 치웅실기를 간행하였고, 박동로는 조상의 숭문사업과 지역 사 회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고헌 박상진 의 사의 재종제인 아정(휘 孟鎭)은 서화가로 필명이 당대에 유명하였다. 창릉 선생(휘 墉鎭)은 학자로 울산에서 유일하게 도산서원장을 행공하였고, 당 대 유림의 좌장으로 도내에 명성을 얻은 큰 선비였 다.창릉문집10책이전해진다. △ 六子 휘 현조(顯祖)는 진사, 그의 아들 수손 (秀孫)은생원이다. 대사헌공의 후손은 현재 6천여 호에 이르며, 조 선조에 청백리 1명, 공신녹권 8명, 대과 20명, 생원 진사 50명, 수령방백과 효자, 열녀는 다 열거할 수 없으며, 학자로 문집간행 25명이고, 난신적자는 한 명도 없고, 국난에 보국 충성하여 이시애 난 평정 에 3명이 원종공신에 책록 되고, 임진·정유왜란에 선무원종공신으로 8명이 녹권을 받았으며, 창의와 무관으로 수 십명이 왜적을 토평하고 병자, 정묘호 란에도 참전하여 사란창의록에 등재되어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독립운동에도수십명의후손이참여 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고헌 박상진 의 사와신흥무관학교를나와임시정부구제총회장과 독립선봉대총대장을 역임한 박소진 의사 같은 분 은 청사에 길이 남을 위인으로 기록되고, 근세에 이르러 행정, 사법, 교육계에 두각을 나타나는 인 물이 즐비할 뿐 만 아니라 한 집안(故 東旭 家)에 사법고시(子 윤환, 손자 항규), 행정고시(손녀 은 정)합격자3명을배출하는등선조의음덕은고루 빛나고 있으며, 대구 경산 영천 울산 지역에 큰 집 성촌을이루고있다. ▲대사헌공파종회 대사헌공의 후손들 은 선조의 유지를 받 들고 후손 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꾸준 히 모임을 가져오면 서 위선사업에 매진 하였다. 종회 창립연 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솔일족친회’ 로 친목모임을 이어 오다 1991년 10월 숭 조 애 종 육 영 의 종 강 삼시 실천과 선영수호 및 제반시설(諸般施設) 관 리 등을 목적으로 회칙을 정비하고 ‘대사헌공파종 회’로 명칭을 바꾸어 초대회장에 재동 현종이 취임 하여체계적인종사운영을선보였다. 이후 수용, 효현, 달수, 정훈, 재용, 일섭, 동준 회 장에이어현동식회장이지난해11월취임하여현 재에이른다. 현 동식회장은대사헌공의19대손(청풍당后)으 로 영천에서 태어나 청운의 꿈을 안고 부산으로 이 주 후 산업전선에서 전심전력하다 퇴직 오직 종사 에 헌신하고 있다. 투명함과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종원들의 단합과 친목도모에는 팔을 걷어 부치는 동식회장은적극적인종사참여만이종회발전의지 름길이라며 종원들을 독려하고 있어 대사헌공종회 의 전 망 과 미 래 는 밝 아 오 고 있 다 . /글븡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밀양박씨대사헌공파문중의시원(始原) 솔일재(率一齋) 선조 유지를찾아븣 도심속에웅장하게자리한한옥한채가있다.주변에고산중학교가있어학생들의심성과인성함양에도어지 간치도움이 될 수 있 는 문 화공간으로가치를 드러내는재사이다.밀양박씨밀직부원군후(后)대사헌공의재사솔일재(率一齋)로이곳시지동은옛날경산 지역으로600여년의세거지로대사헌공의후예 들은경산지역사림에서주도적인역할을한가문으로과환(科宦)과문장에뛰어난많은인물을배출한문중으 로도유명하다.솔일재는3층으로쌓은기단위 에정면5칸측면3칸의규모로겹처마팔짝지붕의전통한옥으로측면3칸중1칸은툇간을두었고,서쪽에서 부터방2칸청(聽)1칸방1칸으로이루어져있 다.출입문은제경문(齊敬門)으로공경히재계한다는의미를담고있으며멀리보아도화려한건축양식을띠고 있어웅장함이엿보인다. 솔일재전경.대구광역시수성구시지동107번지. 대사헌공묘역. 지난11월25일(10.8)대사헌공묘제에후손들이참례하여선조님 의음덕에추원보본의정성을다하고있다. 박동식회장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