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page

4 朴 氏 新 羅 年 譜 조께서 친히 순시하여 농사를 권장하심은 정히 임금의 인정으로서 몸으 로 친히 어루만지시고 정성으로 권하고 독려(督勵)하신 것이니 어찌 후 세의 임금들이 권장하 는 이 름 뿐이고 백성이 굶주리고 헐벗음을 보살피 지 않는 것과 견줄 수 있겠는가 왕비께서 수행했다는 것은 잘 알 수 는 없으나 양잠은 왕비에게 관계되는 일임으로 동네의 부녀자들에게 가르치 기 위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유리왕 때에 왕녀로 하여금 부내(府內)의 여자를 이끌고 길쌈 솜씨를 시험한 일이 있으니 성비의 유풍이 훌륭한 바라 하겠다. 19년 임오(壬午) B.C 39년 변한이 경남지방(弁韓:慶南地方)에 와서 황복 하다. 21년 갑신(甲申)에 경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이름 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옛날에 군주가 덕을 닦고 인정을 베푸는 것을 먼저 삼 고 성곽과 궁실을 짓는 일은 오히려 그 다음 일이므로 옛날에 흙을 둘러 서 성을 쌓되 그 성이 한길이 넘지 않았으며 요(堯) 임금은 초가(草家) 집에 살면서도 민방(萬方)이 마음을 합해 화목 했으며 우(禹) 임금은 궁 실(宮室)을 낮게 하고 천하를 위해 지극한 덕을 베푸시어 백성들이 높은 덕을 형용(形容)할 수 없었다. 우리 시조께서 왕위에 오르신지 21년에 경성을 쌓고 26년에 궁실을 지으셨으니 그 어찌 덕정을 앞세우기 위해서 성곽과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덕화가 행해지고 풍 속(風俗)이 아름다워지며 은혜가 흡족해지고 백성이 화목해진 뒤에 성곽 과 궁실을 짓되 성은 반드시 홁으로 쌓고 궁실은 낮게 지었으니 후세의 임금들이 백성을 괴롭히고 재력을 낭비하여 긴성과 높은 집을 지어서 사 치하고 장려함을 자랑하는 것과는 판이할 것이고 그 성을 쌓고 궁실을 지울 때도 반드시 모든 백성들이 자기일 처럼 즐겁게 협력 하였을 것이 니 후세에 임금들은 이것을 본받을 만한 일이다. 30년 계사(癸巳)에 낙랑(樂浪)인이 침입하여 국경까지 왔다가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들판에 노적가리가 있는 것을 보고 “도의(道義) 를 지키는 나라이니 가히 침범할 수 없다.” 라고 돋 철병(撤兵)하여 돌 아갔다. 53년 병진(丙辰)에 동옥저(東沃沮)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 20필을 바치 며 말하기를 과군(寡君)이 남한에 성인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