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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1월30일 목요일 12 (제131호) 기획 부산본부(회장진국)는지난2일‘종친화합과선조의덕업을되새겨이어받기’를슬로건으로선조유적탐방 에나섰다.이번선조유적탐방은경북 청도지역에 산재해 있는 명현선조들을 배향하고 있는 훈령서원,용강서원,선암서원,임호서원을 돌아보고 운강고택과 운림고택(김씨)을 돌아보 며 선조들의 충절을 기리고 삶을 엿보았다.부산본부의 유적탐방은 매년 정기적인 행사로서 이를 통해 선조 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종원의 화합과 보학상식증진등지식함에나서고있어이번호에서는부산본부유적탐방지를함께소개해보고자한다.(임호 서원은2012년11월호12면선조유지 를찾아서,‘밀양도호부사겸청도조전장박경신선생’을다루면서소개한적이있어기회가되면다시소개해 보고자한다.) ●훈령서원(薰嶺書院) 훈령서원은 두촌선생(杜村先生 諱 揚茂)의 曾孫 이신 화은선생(華隱先生 諱 繼恩)께서 1471년 한 재(大峴)에서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新村里-新 安)로 신안 훈령산(薰嶺山) 아래에 글방(書堂)을 짓고 글을 베풀어 교남사림(嶠南士林)이 알고 즐 겨 교통(交通)하므로 훈령서당이 종사(宗事)를 보 는 재궁(齋宮)을 겸하여 문(文)과 도의(道義)를 강론육성하는 학당(學堂)이 되어 유문(儒門)이 더 욱 창달(暢達)되고 위선종사(爲先宗事)의 중심으 로 오백년 전으로부터 종인(宗人)은 강당으로 일 컬어오늘에이른다. 불행이 1592년(선조25)의 임진병화(壬辰兵禍) 로 집이 불타고,1623년(仁祖1)에 다시 중창(重創) 하여 훈령서당(薰嶺書堂)을 훈령재(薰嶺齋)로 이 름을 바꾸고 1844년(憲宗10)에 지산서원(芝山書 院)창건(創建)을 병행하여 재사(齋舍)를 중수(重 修)하고 이듬해인 1845년에는 숭절사(崇節祠)를 지어 입향조 두촌선생과 화은, 호재, 농암 선생의 네 분의 선조를 배향하였으나,1868년 대원군의 서 원 훼철(毁撤)로 없어졌다. 그후, 1986년에 숭절사 를 다시 복설(復設)하여 음력으로 삼월과 구월 상 정일(上丁日)에제향(祭享)을올린다. 1908년에 중수한 본당(本堂) 건물의 일부가 후락 (朽落)하고 빈약(貧弱)하다는 종론(宗論)으로 종인 (宗人)의 위선(爲先)하는 헌성(獻誠)이 마음으로, 돈으로,넘쳐구색(具色)의문제로한두개를고을안 타산(他山)의 재목(材木)을 썼을뿐 외국(外國)재목 (材木)은 한자 한치를 아니쓰고 순전히 우리 골안 수 백정(數百町)종산(宗山)의 수백년 거목 장송(長松) 으로 감당하여 고을에서 제일가는 본당(本堂)을 지 어내니 보는 사람이 모두 장대(壯大)하다 흠탄(欽 歎)하였다. 이에,고을사람이 부러워하고 인하여 199 9년 향도유림(鄕道儒林)이 훈령재를 훈령서원(薰嶺 書院)으로승호(陞號)하여지금에이른다. ▲배향(配享)인물(人物) △두촌박양무선생(杜村朴揚茂先生) 자(字)는 약생(若生) 호(湖)는 두촌(杜村) 고려 공민왕 때 등제(登第)하여 선무랑(宣務郞)이 되고 김천도독우(金泉道督郵)를 하였다. 포은 정몽주선 생 문인으로 종유(從遊)하며 우공 현보(禹公玄寶- 字는 原功 丹陽人)와는 막역지우(莫逆之友)였다. 품성이 청백 단아한 준재(寯才)로 촉망(囑望)되었 으나 고려의 운명이 다함을 슬퍼하던 중에 1392년 고려가망하자벼슬을버리고성조용흥정오문(聖朝 龍興正午門) 밖 만수산 깊은 골짜기로 퇴거(退去) 했다. 선생은 만수산 동지 제현(諸賢)과 우공현보 (禹公玄寶)를 향하여 나는 밀성(密城)의 후인(后 人)이라 내가 죽으면 선사(先祀)를 누가 받들겠는 가? 사직(社稷)이 없으니 나라를 위하여 무었을 하 겠는가 전가(傳家)하여 선세(先世)를 절(絶)하지 아니함이마땅하다.밀주(密州)는내할아버지의고 향이다. 하시고 사립(도롱이와 삿갓을 아울러 이르 는 말.)으로 귀향(歸鄕)하여 화양대성산(華陽大城 山)에 은거(隱居)하고 자호(自號)를 두촌(杜村)이 라하니돌아가시고사람들이두촌선생이라하였다. △화은박계은선생(華隱朴繼恩先生) 호(號)는 화은(華隱) 입향조 두촌선생의 증손 (曾孫)으로 총민(聰敏)을 타고나셨다. 어릴 때부 터 정성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경학(經學)에 뜻을 두어 명현대유(名賢大儒)를 찾아 경서(經書)를 익 힘으로「글이바르다」고세상에알려졌다. 세조(世祖) 무자(戊子1468)년에 생원시에 들고 한재(大峴)에서 신안(新安)으로 거처를 옮겨 훈령 산 아래 서당을 지어 글을 베풀었다. 문학덕행(文 學德行)으로널리 추중(推重)되었다. △호재 박맹문선생(湖齋朴孟文先生) 호(號)는 호재(湖齋)이다. 화은공의 아들로 글 공부를 타고나서 아버지 말씀을 따르고 가전(家 傳)을 긍식(矜式)하여 소중히 섬기니 향방(鄕邦) 이 그 효성(孝誠)을 칭송하였다. 직제학(直提學) 최연(崔淵) 선생이 공(公)과 같이 경지(經旨)를 강론(講論)하며 공(公)의 문망(文望)을 흠모(欽 慕)하여 「공(公)의 견해(見解)는 우리 속유(俗儒) 들이미칠바아니다」라고하였다. 성종(成宗)때 관찰사(觀察使)의 특천(特薦)으로 순천교수(順天敎授)가되어사림의모범이되었다. △농암공박란선생(聾巖公朴鸞선생) 1494(成宗甲寅)년에 태어나서 1557년(明宗12 丁巳)에돌아가실때까지많은일을하셨다. 중 종 (中 宗) 임 금 때 사 마 시 (司馬 試)에 올 라 진 사 가되고칠곡(七谷)오수곡(五守谷)자연속에정사 (精舍 )를 지 어 정 거 (靜居 )하 며 삼 족 당 김 선 생 문 (三 足堂 金先生- 조선중기 문신 본관은 김해. 字는 天 佑)에 나가 의례를 강론하고 퇴계 이황, 남명 조식, 경재 곽순 등 제선생(諸先生)과 교유(交遊)하며 높 은 덕행과 밝은 수리(數理)를 떨치니 제사림(諸士 林)이 추중(推重)하였다. 1541년 청도향교 향로당 (鄕老堂)기문(記文)을 짓고 향헌(鄕憲)과 향규(鄕 規)를 목판에 양각(陽刻)해서(楷書)로 현판(懸板) 하여향로당에걸어보전하던중집의퇴락(頹落)으 로칠곡수헌재(守軒齋)에일시보관하고있다가향 교를중수한뒤지인재(智仁齋)에다시걸었다. ●용강서원(龍岡書院) 용강서원은 송은 박익 선생과 임진왜란 당시 14 의사(義士)를 제향하기 위한 서원으로 경북 청도 군 이서면 모산길 45-4, 경상북도 기념물 제129호 로지정되었다. 1590년 후손들이 선조의 묘소아래 묘재(墓齋)를 창건하여 용강재(龍岡齋)한 것이 효시(嚆矢)이다. 그후 1819년(순조19)용강재 내에 충렬사(忠烈祠) 를 창건하여 임진왜란 14의사(義士)의 위판을 봉 안하여 춘추로 사림향사하고 익년(翌年)에 숭의사 (崇義祠)로개편하였다. 1835년 청도에 거주하는 후손의 집에서 송은 선 생의 영정이 발견됨으로써 숭의사에 영정과 위판 을 주벽으로 봉안하고 14의사를 배향하고 향화를 받들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유지만 보존되었으며, 1876년(고종13) 경내에 14의사 묘 정비(廟庭碑)와비각을건립하였다. 1879년(고종16)에 모의정(慕義亭)을 경내에 짓 고 그후 1913년에 향중(鄕中)의 공의(公儀)로서 송은생 묘우만을 복원하여 영정과 위판을 봉안하 고 ‘송은선생영당(松隱先生影堂)’이라 편액하여 춘추로 사림봉사하게 되어 이때부터 용강재를 용 강서당으로 개편(改編)하였고,1960년 강당(講堂) 을, 익년에는 서원의 정대문(正大門)인 삼문(三 門)인숭절문(崇節門)을 중건하였다. 1986년에 14의사 사우인 숭의사(崇義祠)복우너 코 자 경내에 동년 11월에 기공하여 익년 12월에 준 공하고충렬사로환원하였다. 1992년 4월 사림 공의로 송은선생 영당을 여충사 (麗忠祠)로 용강서당을 용강서원으로 개편하고, 199 8년여충사에송은선생의장남우당선생위판을함께 봉안하였고, 같은 해 8월 충렬사 및 14의사 묘정비가 문화재(경상북도기념물제129호)로지정되었다. 용강서원의 강당은 송은 박익선생의 충절을 숭 앙하며 유훈을 강론하고 후손들의 예절교육을 위 한 강학장소,사림공의 및 종사의 대소사를 논의하 는장소로사용되고있다. △충열사와14의사묘정비(경상남도기념물제129호)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월 13일 부산 이 함락되고 20일은 청도까지 함락되자 청도에 거주하 는밀성박씨일문(송은선생의6세손과7세손)부자,형 제,숙질,종반(縱班)14명이비분강개하여함께창의하 기로합의하고,그달25일에기병(起兵)하여적을치는 한편청도지역을방어하였다.이는전국에없었던특이 한 의병활동이었다. 그중 두 분은 전사하고, 열두분이 공신록에녹훈된임란14의사를모신사우및묘정비와 비각이다. 박씨 일문의 의병활동은 삼창삼순팔의(三倡三 殉八義)로 미칭(美稱)되고 있다. 즉 박경신(朴慶 新) 경전(慶傳), 경윤(慶胤) 公을 창의삼충(倡義 三忠)으로, 임란때 순절한 박경인(朴慶因), 경선 (慶宣) 公과 병자호란때 순절한 박우(朴瑀) 公을 순절삼충(殉節三忠)으로 박지남, 철남, 선, 찬, 린, 근,숙,구(朴智男,哲男,瑄,璨,璘,瑾,琡,球)公을 거의팔사(擧義八士)로전송(傳誦)되고있다. △14의사 및 녹훈(錄勳) ●선암서원(仙巖書院) 선암서원은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335번지 에소재하고있다.부근에동창천물이굽이쳐흐르 는 선암에 자리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로지정되어있다. 당초 1568년에 매전면(梅田面) 동산동(東山洞) 운수정(雲樹亭)에 향현사(鄕賢祠)로 창건되었다 가 1577년에 군수 황응규(黃應奎)가 현위치로 이 건하고서원으로승격하고개칭하였다. 1677년에군수서문중(徐文重)이중창하였으나1868 년에대원군의서원철폐령에의해훼철되었다가1878 년에소요당후손들에의해선암서당과소요당으로개 칭되어 중건되었다.삼족당(三足堂)김대유(金大有)와 소요당(逍遙堂)박하담(朴河淡)을배향하고있다. 대문간채를들어서면안채,득월정(得月亭),행랑 채가 ‘ㄷ’자 평면을 이루고 그 뒤편으로 남향한 선암 서당(仙巖書堂)이 있다.이 건물은 정면 5칸,측면 2 칸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깔고, 양쪽으로는 방을들였는데위패는모셔지지않았다.선암서당의 뒤편에는 장판각이 있는데 보물 제917호 배자예서 운략판목(排字禮部韻略板木)과지방문화제해동속 소학판목,14의사록판목등이보관되어있다. ▲배향인물 △소요당박하담 소요당 박하담 선생은 송은 박익 선생의 현손으 로 6세인 1484년 글을 읽기 시작하여 14세인 1492 년에는 ‘대학’과 ‘중용’을 읽었고, 18세인 1496년에 는 ‘소학’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 해에는 평생의 지기이자 절친인 삼족당 김대유와 함께운문산운문사로들어가서‘맹자’를읽었다. 31세인 1509년 ‘심경(心經)’을 읽고 성리학에 전념 하면서 과학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36세가 되던 1514 년 사육신의 묘소가 있는 노량진을 지나며 감회를 읊 은시를지었고,경기도파주에우거하고있는청송(聽 松)성수침(成守琛,1493년~1564년)을예방하였다. 다음해인 1517년 ‘근사록’을 읽고서 감명을 받아 이를 인쇄하여 보급하고 아울러 ‘심경(心經)’도 간 행하였다. 중종 11년(1519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후 유일로 천거 받아 현량과에 추천되었으나 응시 하지 않고 정암 조광조 등 신진사류가 피화(被禍) 한 기묘사화(1519년) 이후에 그동안 자신이 지었 던 글을 모두 모아 불태워 버렸으며, 임진왜란 이 후로는遺文마저없어졌다고전한다. 46세와 47세에 사산감역과 사재감봉사에 제수되 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48세 때에 경재(警齋) 곽순 (郭珣,1502~1545)과 성리설을 강론하였다.50세이 던 1528년 장악원사평에 제수되자 그간 누차 벼슬 을받고서집에그냥머물러있을수없다고판단하 고 상주까지 올라가서 상소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선산에 들러 송당 박영 선생을 예방하고 함께 향음 주례(鄕飮酒禮)를거행하였다. 58세에 ‘운문구곡가’를 지었고 59세때 ‘가례(家 禮)’를 강론하고 송당 박영의 방문을 받았다.65세이 던 1545년에 남명 조식이 ‘입암정사’를 방문하자 여 러학생들을위하여‘서명(西銘)’과사자서(四子書) 의 의문점, 하락태극도설(河洛太極圖說)의 강론을 청하였다. 69세이던 1547년 에 송계 신계성(申季誠, 1499-1562)이 방문함에 함께 ‘주역‘을 토론하였다. 그후82세가되던1560년11우러19일에자손들을위 해’가훈10조‘를남기고입암정사에서서거하였다. 소요당 선생은 생애는 애민사상이 강하다 할 것 같다. 김대유와 함께 산동지역이 군소재지와 멀고 길이험하여백성들이官家에납부할곡식을운반하 기가 불편하다는 향촌민들의 민원을 적극 수용하여 사창(社倉) 건립을 실현시켰으며, 행단을 설치하여 향촌민들과 향음주례를 익히는 등 적극적인 성리학 실 천 운 동 을 벌 여 나 갔 다 . 사 창 건 립 이 나 향 사 례 와 향음주례가 16세기 사림파들이 향촌 주도권을 잡아 가는 과정에서 향촌민들을 교화시키는 주요한 수단 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박하담 이야말로 16세기 사 림파학자들의전형적인모습을보여주고있다. △삼족당김대유 본관은 김해(金海).자는천우(天祐),호는삼족당 (三足堂). 김극일(金克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의(執義) 김맹(金孟)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김준 손(金駿孫)이며, 어머니는 사도시정(司 寺正) 고 태익(高台翼)의 딸이다.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 다.조광조(趙光祖)·조식(曺植)등과친교를맺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김일손이 화를 당 하였을때아버지와함께호남에유배되었다가1506 년(중종 1)에 풀려났다.1507년 진사가 되고,1518년 행의유일(行誼遺逸)로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사직하고고향인청도로돌아갔다. 1519년 현량 문과에 3등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전 적·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정언·칠원현감(漆 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제 (科第)를 삭탈당하였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면서 전적에 재서용되어 상경하던 도 중에병이나향리로돌아가죽었다.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 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 다. 청도자계서원(紫溪書院)·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譜)』가 있 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발췌하였음) △배자예서운략판목(排字禮部韻略板木) 선암서원(仙巖書院) 장판각에 보관되어있는 이 판목은 청도 문화재의 자랑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학상 유일한 각판목(刻板木)이라는 점에서 큰 가 치를지니고있다.예부운략(禮部韻略)은학문을연 구하는 기초사전으로서 송(宋). 원(元)대부터 우리 나라에 수입해온 음운고사전류(音韻考辭典類)이 다.고려이래선비들의필수자전으로쓰여왔고조선 시대에 들어와『홍무정운(洪武正韻)』『동국정운(東 國正韻)』이 새로 나왔으나 일반인은 여전히 예부운 략을 사용하였으며 뒤에 찾기에 간편한『삼운통고 (三韻通攷)』가 보급되기까지 애용되었다. 이는 한 문공부의기초부터율시(律詩)작문등에없어서는 안되는것이고특히과거응시자들의필수서로과거 를 관장하는 주무부서인 예부(禮部)의 명칭을 붙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예부운략(禮部 韻略)은 1300년(충열왕26년)에 발행한 해계서원판 (海 溪書院 版)이 다 . 그 러 나 이 는 중 국 에 서 간 행 된 판 목으로 추측되고 1524년(중종19년)에 황해도에서 예부운략(禮部韻略)을 간행하였다고 전해오나 지 금은현존하지않는다.청도의예부운략은원래1464 년(세조10년)에 방촌 황희(黃喜)의 손자 황종형(黃 從兄)이 청도군수로 있을 때 김맹(執義 金孟1410∼ 1483년)의글씨로만든예부운략(禮部韻略)이 청도 적천사(象川寺)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임란후 제우당 박경전(悌友堂 朴慶 傳)과 국 헌 박 경 윤 (菊 軒 朴慶 胤)형 제 가 충 북 영 동 에서 원판을 구해와 1573년(선조6년)에 복각한 만 력판(萬曆板)12매와 1679년(숙종5)에 박동부(朴東 傅)에 의해 다시 복각한 강희판(康熙板)150매 합16 2매로 크기는 세로20.5cm 가로46.2cm 두께1.8cm이 다. 이것이 오늘날 선암서원(仙巖書院)에 보관되어 있는 배자예부운략판목(排字禮部韻略板木)이다. 학자들에따르면영동에서구해온원본은청도의황 종형(黃從兄)군수 때 만들어진 천순본(天順本) 예 부운략의 복각본(復刻本)이라 한다. 따라서 선암서 원(仙巖書院)에 현재 소장되어있는 만력본(萬曆 本) 예부운략은 청도에서 세조때 간행된 천순본(天 順本)의 복각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천사(象 川寺)에 보관 중이던 천순본(天順本) 예부운략이 우리나라의 최고본 예부운략이었으나 아깝게도 왜 란 당 시 불 타 없 어 지 고 복 각 본 이 라 할 수 있 는 선 암 서원 소장의 예부운략이 우리나라 유일의 예부운략 으로 희귀본에 속하며 현존 판목수는 152매이다.배 자예부운략(排字禮部韻略)은 서(序), 본문(本文), 옥편(玉篇), 발(跋)의 4개 부문으로 구성(構成)되 었다.강희판(康熙板)은5권2책으로간행되어유포 된바 있으며,이들 판목은 조선조 서지학,특히 판각 연구및국어학연구에중요한자료들이다. ■부산본부와함께하는서원탐방 훈령서원,용강서원,선암서원,임호 서원 선조 유지를찾아븣 지난2일훈령서원을찾은부산본부선조유적탐방단을맞아밀직부사공종중임원진의융숭한접대와함께서원내역을희준前숭 덕전·릉참봉협의회이사장이자세히설명하고숭절사참배후 강당앞에서기념촬영을하고있다. 용강서원전경-①여충사②강당③충열사④용강재⑤동재⑥서재⑦비각⑧삼문⑨문화재지정간판⑩하당⑪관리사 선암서원전경-선암서원은현재전통고택숙박체험관으로전통다도&다식만들기,전통음식만들기,숙박체험,천연염색,한지 공예,규방공예등다양한체험공간으로찾는이를맞이한다. 성명 호(號) 관직 훈격 등위 박경신 삼우정(三友亭) 贈병조참판 선무원종 1등공신 박경인 용연(龍淵) 증사헌부지평 〃 박경전 제우당(梯友堂) 증병조판서 〃 2등공신 박경윤 국헌(菊軒) 증병조판서 〃 2등공신 박경선 증승정원좌승지 〃 박지남 계애(溪崖) 동지중추부사 〃 2등공신 박철남 운애(雲崖) 충무위부장 〃 2등공신 박 선 괴정(槐亭) 한성부우윤 〃 3등공신 박 찬 운옹(雲翁) 훈련원첨정 〃 3등공신 박 린 행와(杏窩) 훈련원첨정 〃 2등공신 박 우 기포(杞圃) 증호조참의 진무원종 1등공신 박 근 죽와(竹窩) 성균관진사 선무원종 2등공신 박 숙 용암(龍巖) 군자감봉사 〃 3등공신 박 구 훈련원판관 〃 3등공신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