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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박공묘갈명 병서 공의 이름은 후생(厚生), 자는 구서(九瑞), 호는 대은(大隱)이다. 계해(1563) 시월 십칠일에 태어나서 을축년(1625) 시월 십육일 돌아가셨다. 박 씨는 신라 밀성대군으로 부터 이어져 나와 밀양이 관향이 되었다. 그 뒤 고려조에 휘 언부(彦孚)는 시중 도평의사로 밀성부원군이 되었고 휘 효신(孝臣)은 시중 도평의사가 되었는데 시호가 문익이다. 여러 대를 거쳐, 휘 영균(永均)은 은산부원군인데 시호가 문헌이다. 휘 익(翊)은 예부시랑으로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서 벼슬을 그만 두었는데 시호가 충숙이다. 덕남서원과 신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휘 총(聰)은 조선조에 천거로 정랑이 되었는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호가 졸당이다. 신계서원에 배향되니 공은 그 6세손이다. 고조 휘 사림(士林)은 군자감판관이며 증조 휘 진(蓁)은 장례원판결사에 증직되었다. 조 휘는 원양(元亮)으로 진사이고 고의 휘는 자(梓)로 호가 운암이다. 비는 의령 옥씨 수백(守白)의 따님이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세상을 경영할 만한 능력과 지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남길 방도에 있어서, 일에는 마침내 차고 넘치는 바가 없어야 한 즉, 얻고 잃음, 영광과 욕됨이 다 운에 따라야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부지런히 일해서 애써 바라고자 깊숙하고 그윽한 땅에 자기를 숨기며 살려 하였으니 운암방(雲巖坊)으로 부터 대치(大峙)에 처자를 데리고 옮겨 와서 성실하게 농사 짓는 것으로 가업을 삼았다. 그리하여 옛사람의 효우충신지훈(孝友忠信之訓)을 자손들이 따르고 익히는 전범으로 삼아서 욕심 없이 깨끗하게 살면서 검소하고 절약하며 분수를 지켰다. 세상사람 들이 볼 때는 비록 빛나고 떨침이 없다고 하겠지만 날마다 일신의 건강과 일가의 성공을 헤아리며 생각한 즉 비롯됨이 없고 넉넉함이 없어도 그 도를 얻었다 할 수 있으리라! 그 뒤로는 긴요하거나 절박한 일이 아니면 농사 짓는 일 외는 바깥 세상에 나가는 것을 자랑삼지 아니하고 오직 쓸쓸히 물과 산 사이에 사는 취미에 붙이어 세상의 변화에도 동요함이 없이 깊숙한 산속에서 농사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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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을축년 향년 63세로 세상을 마치니 대치에서 몇 리 되는 산기슭 서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전주 박씨로 기한(基漢)의 따님이니 을축(1565) 11월 5일생으로 병인년(1626) 5월 십육일 향년 62세로 세상을 마치었다. 부군 묘 옆에 묻히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춘봉(春逢)이요, 차남은 화태(和泰)이다. 춘봉은 아들이 유기(有起) 유석(有錫)이며 화태는 아들이 정구(廷九)와 정검(廷儉)이다. 지금으로부터 공이 살았던 세상은 멀고 아득하여 당시의 일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집안에 전해 오는 바와 자손들에게 세세로 전해진 법도와 나머지 가르침을 보면 비슷하게 상상하여 추측할 수 있다. 공의 후손 성재가 와서 공에 대한 대개를 서술하니 이와 같이 얻어서 공의 묘 앞에 새길 명을 삼가 오른쪽 같이 서술하노니 명하여 가로되, “세간의 영광과 좌절은 운에 따름인 저! 깊은 산에 들어와 깃들어 사니 여유로움이 있도다. 궁색함을 따르자니 무엇을 찾으리오. 힘써 노력하여 몸과 마음이 스스로 편안해 졌다네. 비석에 남길 이 글은, 백세의 징험이니 영원히 새기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단기4301년(1968) 무신 칠월보름 후예 태곤이 짓고 경주 김추산이 쓰다. 번역은 의령에 계시는 족친 석정 박경묵님이 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