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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군편(1까川휩6編) 江陽李씨 太子흩事 譯 公實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휘가 承文인데 벼슬은 正郞이고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요 호는 ↑土村이다. 次 男은 휘가 熙文인데 泰仁 縣藍이고 호는 松짧이다. 同知中樞의 男 士林은 察 誌, 書林은 軍資藍 主樓이고, ↑需林은 習讀官이다. 泰仁의 男에 世林은 縣藍, 彦林은 判事이고, 係林은 通贊이다. 선생이 이곳에 移居하게 된 것은 처가가 三嘉에 있고, 대평은 三山이 수려하게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 마을이 아늑하 고 자손에게 전할 만한 곳 이였기 때문이다. 동리 앞 큰 들 가운데 獨山이 있 어 그 위에 玉山亨을 짓고 遠近의 학자들을 맞아들여 道學을 講明하여 성취 한 이가 많더니 자손들이 그 遺風을 세습하여 몇 대 사이에 官印을 차고 이 亨子에 오른 사람이 八人이 있었기로 고을 사람이 이 정자를 일컬어 掛印享 또는 八人亨이라 했던 일이 삼가둠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慣心慣官篇을 지어 “아직 벼슬하지 못한 이는 근심하나 마음은 편할 것이요 이미 벼슬하고 있는 자는 기쁘나 마음은 위태로운 것이다" 의리를 밝게 보고 천명을 기쁘게 따름으로서 조그마한 출세에 연연하지 않고 차라리 참다운 본성을 보전하려 한 것이다. 世宗 己未(1439년) 2월 2일 西時애 碩命하시니 壽 87세였다. 용주 변 봉기리 觸金洞에 安賽하였고, 대병변 성리 송지동에 유허비가 있으며 산청 군 신안면 진태 新漢書院에 配享하고, 幕聞 鳳陽짧는 봉기마을에 있다. 6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