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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J청군편(山 淸컴11編) 만수당 인량공 유적기 (萬樹堂 寅亮公 遺麻記) 口밀성박씨 口 소재지 ‘ 산청군 신안면 중촌 리 창안 공(公)의 휘(譯)는 寅亮(인량)이요 자(字)는 여건({ý_乾) 호는 만수당(萬樹堂) 이다 密城*'、民 銀山公 後 譯 총(碼)인 졸당공의 玄孫이다. 公은 명종 원년 병오(1546)에 단성헌 월명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성이 孝誠스럽고 友愛 가 있었으며 공손하고 신중했다 부모의 명으로 학문을 읽히고 과거 공부를 하여 향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會試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소에 벼슬 을 하고자 하는 뜻이 없었다. 당시 인물이었던 망우당 곽재우 대소헌 조 종도 (趙宗道) 송암 이노(李홈) 묵웅 권집(權灌) 동계 권도(權濤)등과 학문을 강마 하며 도의지교로 사귀었다. 학문이 깊어 붓을 잡으면 글이 되고 글을 토하변 경(經)이 되었다. 나이 마흔일곱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곽 재우 군사와 힘을 합하여 의령 신반현 등지에 진을 치고 특히 정암진에서 왜 적을 무찔러 전라도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고 경상도 일대를 보위하며 유지 했다. 그 후 병진(1596)에 조정에서 원종공신에 녹권을 내려주었다. 무술 (1598)에 전쟁이 끝나자 향리에 돌아와 주변에 나무를 심어며 스스로 만수당 이라 호를 삼았다.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촌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윤리 와 기강을 바로 하니 公과 뜻을 같이한 여러 사람들이 국가에 법전(法典)의 규정에 의거하여 상소하니 자헌대부 지충주부사를 내렸다. 公은 무인(1638)에 천수를 다 누리고 세상을 마쳤으니 향년 93세 였고 신안변 하정 눌산 건좌에 안장하였고 사후 임란창의 기적비가 도병은(都炳隱)과 같이 二公의 牌가 신안 면 중촌리 창안에 세워져 있고 만수당 박公의 행장은 무인(1998)에 경상대학 교 문학박사 허권수(許橋洙)가 찬하였다. 541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