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page

@ 경남문화유적록 다. 임진왜란에 약년(弱年) 21세로 부모를 따라 청송(춤松)에 피난하였더니, 익년(쫓 B)의 염질(集候)에 양친과 다섯 누나가 병사하자 흙을 덮어 가매장 (假理賽)하고 곧 국난(國難)에 달려들어 창의격초(↑昌義激招)한 사졸(士쭈)을 이끌고 곽망우당(郭忘憂堂)의 휘하에 달려가서 참획조전(參劃助戰)하였다. 1590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조금 진정되자, 그 익년(무술)에 다시 청송으로 달려가 양친과 다섯 누나의 시신을 뭄으로 업어다가 풍각현(風角縣) 북쪽 산 기숨에 안장(安賽)하고 이내 그곳에 살았다. 1618년(광해 10, 무오)에 폐대비(廢大紀)의 변이 일어나자 염연히 항소(抗流) 를 올렸지만 광해(光海)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상청(上聽)되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에 창의(↑릅義) 북상하려 하더니 남한성(南漢城)의 화 의(和議)가 성립됨을 듣고는 “산에 들어가 달가이 숭정의 선비 되지, 세상에 처하여 병자년의 백성 되기 부끄러워라. <入山납作뿔順士 處世毒馬內子民>" 라는 시를 벽상(뿔上)에 쓰고서는 사진(什進)의 뜻을 버렸다. 1620년(광해 12, 경신)에 밀양 사림(士林)이 송계선생(松홉先生) 여표(聞表牌)를 복원건립(復元 建立)하려 하자 순찰사(센察使) 정조(鄭造)가 정인흥(鄭仁弘)에게 비문을 받았 는데, 그 글에 회재 (R每짧), 퇴계(退홉) 양현(兩賢)을 비방한 대문이 있었다. 선 생은 분연(慣然)히 비문을 갖고 가서 인흥(仁弘)에게 돌려주었다. 선생은 이내 선영(先瑩) 아래 풍각 남산(南山)에 거처하면서 뜰에 국화 심 고 못에 연꽃심어 둔세(遊世) 자정(自靖)하니 장려헌(張旅幹)선생이 “국화는 늦가을의 절개요, 못은 밝은 거울 하나 열었네. <衛寫三秋節 澤開-鍵明>"라 는 시를 지어 국담정사(氣澤精舍)라 명명했으며, 세인(世A)은 선생을 숭정처 사(몇順處土)라 일컬었다. 오로지 향풍진작(獅風振作)과 후진교도(後進敎導)에 심 혈을 경주하다가 81세로 몰세(沒世)하였는데, 1672년(현종 13, 임자)에 손자 인 병사(兵使) 진한(振賴)이 귀하게 되어 호조참의(戶費參議)의 증직(體職)이 내렸고, 1691년(숙종 17, 신미)에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선생의 유지(遺址) 에 사당을 세워, 남강서원(南間書院)이라 하더니, 1717년(숙종 43, 정유)에 오 졸재(표쐐顆)선생을 추향(追享)하여 사우(洞宇)를 향현사(兩賢洞)라고 하였다. 선생의 의행청덕(짧行淸德)은 〈국담집(衛鷹集)>에 실려있다. 고향으로 돌아올 당시 사자(耐子) 부호군(副護軍) 류(짧)는 삽포리(級浦里)에 돌아와 살고 차자 뢰(觸)는 풍각 남산(南山)에 그대로 살았다 . • ( 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