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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재기(農山齋記) 대병면 금성산 자락의 율정촌에 재실을 짓고 농산재의 현판을 붙인 것은 곧 옛날 증판임관 栗亭(율정) 밀성 박공 熙善(희선)의 攸芋(유우)하던 장소이다. 공은 실로 勝國(승국) 명현 졸당선생 聰(총)의 후손이고, 마을도 또한 박씨의 고장이다. 氈業(전업)이 빈한하여 공의 대에 와서는 소유한 농지가 불과 이 두락이라서 그 논의 소출로는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부양하는 양식도 충당할 수 없었다. 공이 말씀하되 글을 읽는 것은 몸을 수양하는 것이요, 살림 사는 것은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니, 생명을 능히 구원하지 못한 즉 몸을 어찌 앉아서 수양하리요 하고, 곧 책을 덮고 농사에 돌아와 소작지를 수십 백 궁을 널리 구하여, 힘써 작농한 지 십여년에 창고에 쌓은 곡식이 점점 차서 사축하고 남음이 있었다. 이에 외랑 세칸 초옥을 지어 책을 쌓고, 스승을 맞이하여, 아들 조카와 가난한 마을 영재들을 가르치고, 또 다시 문호를 크게 열어 손님과 친구들을 대접하니, 이때에 와서 남쪽 지방의 과객들이 찾아와 유숙하는 자들이 그의 비는 날이 없었으니, 모든 사람들한테 정성껏 대접하고 노자까지 주어서 보냈다. 만년에 과객들이 비석을 세워서 은덕을 칭송하고, 고을 인사들이 또 공을 위하여 계를 조직하여 자금을 마련하여 장식하니 마침내 山天(산천)을 이루었다. 이때 와서 초옥이 비좁아 능히 대중을 수용할 수 없는 고로, 계원들이 공의 두 아들에게 소청하고 초옥을 철거하고, 계금을 孤注(고주)하여 사칸 오영의 기와집을 그 터에 세워서 高景(고경)하는 생각을 붙일새 공사를 임오년 봄에 시작하여 같은 해 上章閹茂(상장엄무)의 달에 맞추어 좋은 날을 받아 낙성하니 동자와 집이 높이 솟고, 처마와 춘새가 솟고 날아서 가히 바라봄을 아름답게 하고 빛과 색이 움직이고, 따뜻한 방과 서늘한 마루와 바깥문과 결정지가 가히 거처하기 적당하고 체제가 구비한 즉, 특히 계원들이 합잠하고 여택하는 장소만 될 뿐 아니라, 겸하여 공의 묘소 제사할 때 재계하고 유숙함과 종족을 회합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처소로 제공되었고 또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였다. 대개 인정이 부유함은 은혜 베풀기를 좋아함이 쉽고, 가난하고 은혜 베풀기를 좋아함이 어렵거늘 공은 가난하면서 능히 은혜를 베푸니 공은 진실로 뛰어난 덕이 있다 하겠다. 어느날에 증손 홍제가 계원 문병춘과 더불어 그 상량문, 비문, 계서, 묘갈명을 받들고 나의 서산정사를 찾아와서 재실 기문을 청알하니 내가 비록 늙고 치매하나 또한 인륜의 마음이 있어 사람의 착한 일을 말하기를 즐겨하니 지금 이 일에 어찌 가히 그 책임을 사양하겠는가. 지금 우리 나라가 서양 물결에 육지가 침몰되어 綱常(강상)이 끊어지고 道德(도덕)이 떨어져서 사람이 横立(횡립)하고 풍속이 左袵(좌임)하여 그 선인들이 기와집을 버리기를 헌신짝 버리는 것 같이 하여 썩고 폐허되어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가 열에 여덟과 아홉이나, 여러 박씨와 여러 계원들은 세상 풍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선인의 기와집을 사랑하고 보호하기를 자기 몸과 목숨을 보호함과 같이 하여, 이미 상량문을 걸고 다시 기문을 달아서 선인의 경륜과 인덕을 표창하니 어찌 이 같이 어질고 또 효도한고. 그러므로 이 일이 다만 한 고을의 모범만 되리요, 장차 한 나라의 權輿(권여)가 될 것이니, 가히 공경하지 아니하겠는가. 강과 산이 빼어나 아름답고 구름 나옴이 퍼지고 걷히는데 이르러서는 상량문 지은 사람이 다 기술하였으므로 여기에 이중으로 기록하지 아니하노라. 기묘년 구월 소일에 성균관 전의 합천 李相學(이상학)은 삼가 기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