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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9월 9일 한국일보 15면 淸白吏(청백리) 역사기행 〈82〉 松隱(송은) 朴翊(박익) 은 고려말의충신으로 不事二君(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킨 선비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대 변혁기에 忠(충)과 義(의)로써 圃隱(포은)등과 교유하면서 망국을 한탄했다. 八隱集(팔은집) 松隱盲誓篇(송은맹서편)에는 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 牧隱(목은) 李穡(이색)등과 松隱(송은)이 대화를 나눈 대목이 있다. 松隱(송은)은 圃隱(포은) 등과 손을 잡고 고려사직의 기울어짐을 통곡했다. “시국이 이미 이와 같음은 천운이다. 그러나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신하에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 時己若此天也(시기약차천야) 然天無二日(연천무이일) 臣無二君(신무이군)” 또 圃隱(포은)이 죽기를 맹세하던 날 松隱(송은)을 불러 말했다. “사는 것은 임시요, 죽는 것은 영원한 것이니 비록 천운이라 하나 홀로 죽어서 우리 임금계시는 뜰에 돌아 갈 것이다. 오직 내 마음을 아는 이는 天翊[천익, 松隱(송은)], 穡[색, 牧隱(목은)], 再[재, 冶隱(야은)]이니라 生寄死歸(생기사귀) 雖日天命(수일천명) 吾獨歸於(오독귀어) 吾王之庭(오왕지정) 乃知我者(내지아자) 天翊再穡也(천익재색야)” 松隱(송은) 또한 圃隱(포은)을 붙잡고 울면서 말했다. “나 또한 이씨의 곡식을 맹세코 먹지 않겠노라 吾亦誓不食李粟(오역서불식이속)” 朴翊(박익)의 號(호)는 松隱(송은), 字(자)는 太始(태시), 初名(초명)은 天翊(천익)이다. 본관이 密城 밀성, 密陽(밀양)인 松隱(송은)은 銀山府院君(은산부원군) 永均(영균)의 큰 아들이다. 고려 忠肅王(충숙왕) 18년(1332) 밀양군 삽포리에서 태어났다. 松隱(송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기개가 英傑(영걸)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학문에 뜻을 세워 고려 恭愍王(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 東京判官(동경판관), 翰林文學(한림문학), 禮部侍郞(예부시랑), 中書令(중서령) 등을 거쳤다. 松隱(송은)은 조선 건국 전 李成桂(이성계)를 따라 왜구와 변방의 오랑캐들을 평정하는 등 무관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것을 느낀 松隱(송은)은 아우 天卿(천경)과 더불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고향인 密陽(밀양)에서 문을 닫아걸고 은거했다. 이 시절 松隱(송은)은 뜻을 같이하는 여러 선비들과 사귀며 성리학을 탐구했다. 李成桂(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건국된 후 松隱(송은)은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다. 松隱(송은)은 자신을 “청맹과니(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실제로 조금도 보지 못하는 눈)”, “귀머거리”로 칭하며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陽村(양촌) 權近(권근)이 조선 태조의 사자로 松隱(송은)을 찾아갔다가 헛걸음쳤다. 陽村(양촌)은 태조에게 “天翊(천익)은 왕의 뜻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죽음을 삶같이 여기니 신은 그를 오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고 했다. 이후 태조가 吏曹判書(이조판서)등 여러 직을 松隱(송은)에게 권했으나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촉국 흥망 네게야 무슨 관계이랴 / 누구 원수 갚으려고 피나게 우나 / 높고 넓은 하늘 땅 길 잃은 사람 / 달 지고 꽃도 지고 적막한 내 수심 蜀國存亡在爾不(촉국존망재이불) 聲聲啼血報誰仇(성성제혈보수구) 天高地闊微茫客(천고지활미망객) 月落花殘寂寞愁(월락화잔적막수)” 松隱(송은)의 시 “詠杜鵑(영두견)”은 그의 적막한 마음을 드러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죽음이 가까워오자 松隱(송은)은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나는 王氏(왕씨)의 혼령에게 돌아가거니와 너희들은 李氏(이씨)의 세상에 있다. 이미 남의 신하로 되어 충성한다면 힘껏 하라...” 1398년 松隱(송은)은 6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조정에서는 松隱(송은)을 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經筵春秋館弘文館藝文館觀象監事(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겸경연춘추관홍문관예문관관상감사)로 증직시켰다. 또 忠肅公이라는 시호도 내렸다. 松隱(송은)을 배향한 곳은 청도군 이서면 학산리 모산 龍岡書院(용강서원)을 비롯, 密陽(밀양) 德南書院(덕남서원), 山淸(산청) 新溪書院(신계서원) 등이 있다. 龍岡書院(용강서원)에는 松隱(송은)의 절개를 기린 麗忠祠(여충사), 임진왜란 당시 松隱(송은)의 후손인 14인의 충렬과 훈공을 기린 忠烈祠(충렬사) 등이 남아 있다. 松隱(송은)은 麗末(여말)의 선비로서 충절을 지킨 八隱(팔은) 중의 한 선비며 조선왕조를 섬기지 않고 개성 동남쪽에 있는 杜門洞(두문동)에 들어 간 72賢(현) 중의 한 사람이었다. .... [淸道(청도)=李相坤(이상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