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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조 무신변때(서기 1728년) 의령 하실 밀성박씨 한 집안에 셋 충신이 있었으니 운죽과 설송 은원인데 형제와 종형재의 행열이었다. 조정에서 그 공을 수록하고 다함께 공조판서를 주시고 유림들이 그 충의를 흠모하여 하산사를 세워서 제례를 드리고 자손들이 역적을 토벌한 사실과 벼슬줄것을 청한 장첩과 제례드린 문자등을 역어서 실기 한권을 이루었으니 그 머리말은 나의 족숙이신 고금우의 지음이라 무진변이후에 사우를 당으로 변모시킴으로부터 풍운이 잠잠해지고 산천이 극히 변천되여 충의가 어떤것인지도 몰라 보게되니, 이에 돌을 깍아서 사적을 드러내여 동이랖에 세우려 할새, 종손 종만이 집안사람을 나에게 보내서 비문을 맡게하니 내가 생각하건대 족숙 금웅의 문장이 고결해서 문자를 쓰는 솜씨가 저울로 달드라도 차가 없을것 같이 세일이 다지는 분인데 삼공에게는 칭송하기를 서슴치 아니하니 그 말씀을 더울 믿을수가 있는지라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글을 지음에 이르는 바, 운죽의 휘는 중로요 자는 진경이니 갑술년에 출생하여 기미년에 졸하고 묘지는 가마앞산 해좌이고 배는 정부인 인처이씨요 묘지는 가락 무좌로 된곳이며, 설송의 휘는 동로요 자는 진수니 을해생이며 경자년에 졸하고 묘지는 운죽과 같은곳이고 배는 정부인 김해김씨니 묘는 쌍분으로 되여있으며, 은월 휘 치로요 자는 진칠이니 임오년생이고 무술년에 졸하였으며 하실 봉황정ㅇ의 곤죄며 배는 정부인 의령남씨이니 한무듬으로 되여있고, 경주최씨도 같은곳이다. 삼공은 고려말의 좌의정승인 충숙공 익 송원선생의 후손이다. 증조는 영립이요 호는 송오였으며 조는 승엽이다. 운죽과 은월의 부는 장익이요, 설송의 부는 창익이다. 삼공이 어렸을때 사기를 읽다가 정영 저 구의 사실이 나오매 스승이 묻기를 너희들을 이와같이 되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하니 운죽이 말하기를 고자를 세우리다. 설송이 말하기를 죽으리라 하드니 장성하여 운죽은 손오의 병서를 끝없이 읽었고, 설송은 격물치지와 성의점심을 읽고 성학에 종사하였다. 그러드니 어느날 설송이 말히기를 우리형은 활이나 쏘고 말이나 타는 무사로다하니 운죽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백부의 장이 되는것이 일개 서생보다 얼마나 나으냐하였고, 은월이 말하되 형님은 군막안에서 전술을 써서도 천리밖의 적도 무찌를것이다 했다. 무신년 봄이되자 이인좌 정희랑의 반역무리들이 벌떼처름 이러나서 가마솟에 물끓듯이 팔도 각처에서 날뛰는 지라. 이때 의령원 박필신은 모상을 당하여 서울로 가고 함안원 조호신이 의령까지 겸직하든때라, 진주병사 이시번이 운죽으로 하여금 의령원을 채시하여 성부를 지키게 하였는데 역적이 졸개를 보내여 격문을 전하게 하였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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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도가 격문을 갖이고 성밖에 당도한 즉, 군문이 정숙하여 감이 침범치 못하다가 밤이되자 어두움을 틈타 담을 넘고 드러와서 공에께 격문을 전하게 되였다. 그 격문인즉 모래 정오에 군가와 병졸을 본진으로 대령하라. 불응하면 몰살한다 하였다. 공이 칼을 뽑아서 격문을 찟어 버리고, 그 역도의 목을 베어, 진주병사에게 보내니 병사가 매우 좋아햇다. 그리고 군사에께 영을 내려 누구가 역도를 성안에 드려오게 하였느냐? 하니 한 병사가 고하기를 밤이 깊어서 알지 못했읍니다함으로 공이 크게 노하여 이 자를 군법으로 처형하고 병사에 보고하니 병사가 장하고 여기고 의령워은 능이 방어장을 삼을만하다 하고 드디어 날짜를 정하여 삼가에서 희벼할것을 약속함으로 공이 관졸을 모아서 부대를 편성할때 한 노비가 울면서 말하기를 천비는 다만 자식하나만을 의지하고 있아오니 재물로서 자식의 출넌을 대신 해주기를 원합니다 하거는 공이 군의 사기를 위하여 처형하고 두 아우와 더부러 닭피를 마시면서 맹서하고 붉은 실로 성명을 수 놓아 옷깃에 감춰넣고 행군하여 병사와 만나니 병사가 공을 보니 범의 수명에 곰의 상이며 목소리는 큰 오뢰와 같은지라 병사가 기뻐하면서 이제서야 용장을 얻었도다 하고 공의 막하의 인물은 누가 있는고 물은즉 공이 답왈 아우가 있는데 한 아우는 지모롭고 한 아우는 용맹스럽다고 하니 병사가 두 공을 불러드려 계책을 무르매 대답하기를 관군은 군사와 병기가 정예롭고 양곡도 풍족하니 마땅이 소를 잡아 군사들에게 군중연회를 베풀고 선서하여 말하되, 이제 힘을 다하여 우리 임금님을 보호한다면 살아서는 충신이요 죽어서는 절사가 될것이다라고 하면 군정이 감동하여 저 까마귀떼 처럼 모여든 반적들을 북소리 한번 울리는 사이에 다 잡아서 승리할것입니다 한즉 병사가 좋은 계책다 하고 곧 군사들에게 소를 잡아 연회를 베푼후 진군하여 오죽봉에 진을 치고 진주영장 이석복을 선봉으로 삼아서 삼가에 이르렀으니 병사는 스스로 후군대장이 되여 머뭇거리면서 진군이 잘 안되거늘 공이 빨리 진군할것을 영장에게 재촉한바 영장이 공을 전봉장으로 삼고 두 공을 군종모사로 삼아서 공을 선두에 세게하여 산청이 있든 역적 수십명을 처서 죽이고 계속 후퇴하는 적을 거창소사까지 추격하여 제장들과 같이 위병계를 써서 좌우로 싸고 처들어가니 역적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여 하늘로 나를수도 땅으로 숨어들수도 없어서 혼이나고 있을때 공이 크게 외쳐말하기를 역도들아 너희들도 우리 임금님의 백성인데 어찌하여 역적들에게 붙어있느냐, 우리와 같이 역적을 친다면 살여줄것이나 반항하면 모두 섬멸할것이다하니 역도들이 창과 칼을 숙이는 지라 관군이 승세를 타고 돌진하여 역적 두목 정희랑등 이십여명의 목을 베니 이 날이 서기 1728년 음력 4월 4일디ㅏ. 이때 하늘에서 번개와 우뢰가 치고 소낙비가 퍼붓듯이 나라다가 잠시후에 그쳤다. 삼공은 역적을 토평한뒤 공로를 말하지 아니하고 은거하면서 하도 낙서를 벗삼아 학문을 강론하고 외출을 삼가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높이 우러르보게 되고 각 촌락의 사랑방에서까지 삼공의 무공담으로 꽃피우게 되었다. 오호라 삼공은 초모와 포의로서 임금님의 궁하심에 달려가서 구하기를 부모 구하기와 같이하였고 국가의 위난을 손바닥 뒤집듯이 건지어 내서 강토로 하여금 태산처름 튼튼히하고 백성을 안도시키되 복희씨 시대처름하니 정기는 하늘의 가르침을 받고 대의를 거행함이 없었다면 어찌 그르한 대공을 세우고도 고향땅 우막집 봉창아래로 도라가서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공중의 뜬 구름보듯이 가벼이 할수 있겠는가. 이에 마땅이 명을 새길찌니 가꾸면 추수도 풍족함이라. 삼공을 내가 보니 이와같은 이치로다. 어찌 홀라 사씨집영운과 례련뿐이오. 문자으로 마지려하나 충의가 이르하니 내 나름대로 말하건대 저보다 이가 낫네. 이 비분짓고 써서 자손들 소원갚고 동서로 지나가는 사람마다 뽄받기 권하노라. 정유년 7월 1일 광주인 노근용 삼가지음 운죽공 7세손 무제 번역및 글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