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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PD였다. 세상에나. 중고시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음악 듣기로 날밤을 세우다 핍박을 받 았던내학창시절흑역사에대한보상을이런식으로받게될줄이야. 음악 시험(팝이니 클래식이니 심지어는 악보 보기까지)에 시사상식, 작문, 기타 등등에 난 시험을 본다기보다는 신나는 마음으로 과정을 즐겼고, 이곳 또한 합격한다. 한 동 안 대학주보 선배들과 밖에서 따로 만났는데, 자기네 대학주보로 오라고 강권을 받으 며속으로으쓱했었던치기어린기억을새삼스레꺼내본다. 하지만 인연은 따로 있는 법. 나는 주저 없이 VOU를 선택했고, 그것이 지금 보면 내인생의한전환점이되지않았나싶다. 수습 기간이라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겠지만 만만치 않 은통과의례들이기다리고있었다. 엄청나게 근엄한 자세로 강습했던 이진섭 실무국장(31기), 색깔이 많이 들어간 안 경을낀진섭형을나는한참동안VOU를다스리는교수님으로착각했었다. 진짜다. 아무튼 수습 시절은 공포의 신입생 환영회로부터 시작됐다. 그 끔찍한 기억이 그 리워지는 이유는 뭔가. 이모집. 냉면 그릇 위로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리던 25도짜리 소주 2병. 또 맥주잔에 원샷, ‘다꽝’안주, 박아, 대운동장으로 뛰어, 본관 분수대를 향 한 방뇨, 밤하늘을 가르던 욕지거리, 걸레처럼 널부러졌던 한일여관에서의 하루, 다음 날 아침 눈이 벌건 우리들 앞에 나타나 준 동기 언니들의 의리를 기억한다. 지금도 그 런과정이남아있다면, 아마9시뉴스를장식하고도남을먹잇감으로충분할것이다. 막막했던 3인조수습작품강습(누구는3인조강습을일컬어‘3달가르쳐놓고인정사정 없이 조져대는 강습’이라고 했다). 방송국 앞뜰에서 둥글게 모여 악명 높은 방송국 모기 에 뜯겨가면서 오전 이른 시간부터 어둑어둑해지던 여름 저녁 시간까지 체력전으로 버티며 선배들의 얼토당토않은 악다구니를 견뎌내야 했던 이른 바 삼인조 모니터. 욱 하는마음에이고비를못넘긴수습들이얼마나많았을까? 그리고 그해 여름 떠났던 8일간의 제주도 여름 세미나. 뜨겁고, 아름답고, 행복했 기별 Essay | 0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