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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다닌다고비난하는후배들이많았다. 지금생각해보면, 의도한일은아니었지만선배답지못했던부분들이미안하다. 하지만 수업만 끝나면 방송국으로 향했다. 같은 과 남학생이 어느 날 내게 국문과 학생인지, 방송국학생인지 모르겠다며 정색을 하고 나무랐다. 그 시절 우리에게 VOU 는중독같은것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축제를 즐길 때, 우린 다른 축제의 기억을 쌓았다. 스피커 설치, 마 이크 설치로 형들은 밤늦게까지 교정을 힘들게 오르내렸고, 우리는 그린하우스의 잊 을수없는마가린녹인설탕식빵을나눠먹으며축제장을지켰다. 혹여마이크가고장 날까, 스피커가나오지않을까노심초사했고, 장비가노후해설치도어려웠다. 그 와중에 우린 나름대로 축제를 즐겼다. 함께 교내 합장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던 기억은두고두고우리의기억을풍요롭게했다. 지금도가끔여행을함께할땐화음을 맞춰불러보기도한다. 70년대의 시국은 늘 어수선하고 살벌해서, 우리는 한번도 2학기 수업을 제대로 못 하고 졸업을 했다. 덕분에(?) 방송국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함께 참 많은 기억을 쌓 아갔다. 그중두번의여행은잊을수없는사건을만들어지금도우리를웃게한다. 1972년 가을의 대천해수욕장. 여행의 종착지였던 대천해수욕장에서 떠나기 전 일 몰을 보며 종배 형의 기타에 맞춰 노래 부르다, 해지는 바다에 심취해 예정에 없던 하 루를 더 머무르게 되었다. 돈이 없어 저녁으로 끓였던 라면! 라면을 끓일 줄도 모르며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던 L언니의 솜씨 덕분에 미지근한 물에 불어터진 라면을 맛있게 먹어주던 영일 형, 효남 형은 4개월 함께한 VOU 시절의 인연을 놓아버리지 못해, 지 난 40년 동안 미국에서 한국으로, 끊임없이 돌아오곤 했다. 미군이 되어 돌아왔고, 대 학원생이되어돌아왔다. 그리고지금은퇴직해서제주도에집을마련하고, 매년돌아 온다. 우리에게VOU는그런곳이었다. 두 번째 여행의 기억은 춘천이다. 그땐 통금이란 것이 있었다. 밤 12시부터 아침 5 044 | 대학의 소리 방송국 - VOU 6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