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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일원으로서역할을톡톡히할수있었던시기였을수도있겠다는생각이든다. 여기까지는 금번 기회를 빌어 현역에 있는 YB 후배님들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가치와중요성을한번생각해봤으면하는마음에두서없이풀어낸서두였다. 굳이 본론이라고 하기에도 남사스럽지만, 아무튼 요청받은 성격의 글, 즉 지나간 시절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 보면, 막상 떠오르는 기억은 대부분의 기수들이 공감할 만 한 내용들이 대부분인지라, 아마도 좀 연식이 된 기수의 경우 악명 높았던 신고식, 목 이 쉬지 않으면 결코 통과할 수 없었다는…, 또 이따금 MT 자리를 빌어 하사하시던 선 배들의한딱까리, 술이술을먹던매번의술자리, 무더위와졸음, 또같은조원간의갈 등, 선배들의갈굼등끝까지평정심을지키기가결코녹록치않았던3인조모니터, 그 리고세미나, 방송제등등…. 뭔가 VOU 43기만의 회고록이 되었으면 좋겠으나, 개개의 에피소드로 풀어내기엔 상기의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듯하여, 동기들과 사전 논의 없이 나의 주관적인 개인사 위주로 글을 풀어나가야 하는 점에 대해 많은 이해를 구해야 할 것 같다. 아직까지도 매우 더운 날이면 어김없이 저녁 뉴스에 언급되는 94년의 폭염을 이겨 내고대학에입학한우리기수는95년봄. 나를 비롯한 2차 수습까지 총 20명이 넘는 꽤 많은 수의 인원으로 시작했다. 개인 적으로는 무려 비틀즈 멤버 4인의 이름을 외우는 풍부한 음악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당시입국시험에떨어지면어쩌나노심초사했던기억이지금도선하다. 여러 동기들이 개인사로 탈국하고, 남은 이가 아홉. 떠난이들도, 남은 이들도 다들 개인사가있었겠지만, 나는왜남았을까. 딱히기억이안난다. 1학년 때는 봄, 여름내 강습, 3인조 마치고 수습 떼니 내 옆엔 방송국 계단에 말없 이 앉아 서로 울리지 않는 삐삐만 바라보던 엄모 형밖에 없었고 2학년 때부터야 TV방 송 케이블 설치한다고 온 교내 지하 배관을 헤집고 다녔던 매우 뜨거웠던 여름의 기억 과 낳으시고 채마저 기르지 못했던 45기 자식들을 남겨놓고 군대에 다녀오니, 어느덧 기별 Essay |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