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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는 聰(총)이요, 字는 瞑翁(명옹)이며, 號는 拙堂(졸당)이다. 松隱先生의 第四子로 高麗 恭愍王2년(1352년) 癸巳 6월 24일에 밀양 삽포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夙成(숙성)하였으며, 天資(천자)가 篤實(독실)하고 學問(학문)에 勤勉(근면)하였으며, 成長하여 憂堂(우당), 忍堂(인당), 啞堂(아당) 세분 형과 함께 圃隱先生(포은선생)의 門下(문하)에서 배워 크게 師宗(사종)의 奬許(장허)를 입었다. 先生은 兄弟(형제)가 서로 스승과 벗 구실을 하여 안으로 智德(지덕)이 充積(충적)함에 착한 이름이 四方(사방)에 들어났다. 吉冶隱(길 야은), 李陶隱(이 도은), 卞春堂(변 춘당), 春亭(춘정), 成獨谷(성독곡) 같은 諸賢(제현)과 道義(도의)로서 사귐이 깊었고, 冶隱先生(야은선생)이 일찌기 말하기를 "벗이란 그 德(덕)을 벗하는 것이니 公(공)은 나의 스승이요. 나의 벗이 아니다." 하였고, 春堂(춘당)은 贈詩(증시)하여 이르기를 "忠烈(충렬)한 松溪(송계)의 집에 淵源(연원)있는 四友翁(사우옹)이라." 하였다. 兄弟四人(형제4인)에 伯氏(백씨)는 憂堂(우당), 仲氏(중씨)는 忍堂(인당)이니 모두 自身(자신)을 警戒(경계)하는 뜻이요, 拙堂(졸당)이라함은 周氵+廉溪의 賦拙(부졸)의 뜻을 딴것이다. 卞春堂(변 춘당)이 銓位(전위)에 있으면서 公(공)을 孝行(효행)으로 薦擧(천거)하여 戶曹正郞(호조정랑)에 있을때 疏狀(소장)을 올려 直言(직언)하다가 크게 權貴(권귀)의 미움을 받아 오래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道義(도의)를 講明(강명)하고 經史(경사)를 硏究(연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귀양살이에서 스스로 회포를 읊은 詩(시)에 "어느날 꿈에 임금님 오셨더니, 깨어서 알고보니 강 기슭에 누었네. 신하가 되었거든 벼슬의 높고 낮음을 말하지 말라. 타고난 天性(천성)이야 누군들 임 그리는 마음 없으랴." 하였다. 또 愼心(신심), 愼官篇(신관편)을 저술하여 말하되 "아직 벼슬 못한 이는 비록 근심하나 마음은 반드시 편할것이요, 이미 벼슬한 이는 비록 기쁘나 마음은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다. 벼슬하여 백성을 다스림에는 良心(양심)을 보존하는 것만 같음이 없으니 벼슬에 있는자 慾心(욕심)을 줄이지 못하면 반드시 天性(천성)을 상실하리라." 했으니 대가 仕綠(사록)으로 구하는 목적을 삼지 않고 오로지 학문으로 본바탕을 삼았던 것이다. 晩年(만년)에 山水(산수)에 情懷(정회)를 부쳐 叔兄(숙형) 啞堂(아당)과 더불어 洛東江(낙동강) 우편 陜川郡(합천군) 서쪽 三嘉(삼가)의 嶽堅(악견), 錦城(면성), 墟屈(허굴), 三山(삼산)이 둘러싼 松旨村(송지촌)에 卜居(복거)하니 마을앞 들녁 가운데 있는 小崗(소강)에 玉山亭(옥산정)을 세우고 逍遙觴詠(소요상영)하며, 선비들과 學文(학문) 講論(강론)하고 늙도록 게을리하지 않으니 탁연한 일세의 宗師(종사)이다. 세종21년(1439) 己未(기미) 2월 2일에 殞命(운명)하니 享壽가(향수)가 87이었다. 세종대왕이 특별히 吏曹參判(이조참판)을 증직하니, 특이한 恩數(은수)이다. 합천군 용주면 봉기리 旀金洞(며금동) 酉坐原(유자원)에 禮葬(예장)하니 莎臺石(사대석)에 世閥(세벌)과 履歷(이력)이 새겨져 있다. 헌종5년 己亥(기해)에 丹城(단성)의 儒林(유림)들이 선생을 新溪書院(신계서원)에 配享(배향)하였다. 啞堂(아당) 聯芳實紀(연방실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