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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先生)의 휘(諱)는 익(翊)이요, 초휘(初諱)는 천익(天翊)이며, 자(字)는 태시(太始)이고, 호(號)는 송은(松隱)이며,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다. 성(姓)은 박씨(朴氏)로 신라시조(新羅始祖) 왕(王)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시조(始祖)로 하는 밀성대군(密城大君)의 후예(後裔)로서 중조(中祖) 휘(諱)가 언부(彦孚)의 7세주손(七世胄孫)이다. 선고(先考)는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이고,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이며,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고, 휘(諱)가 영균(永均)이시며, 비(妣)는 능성구씨(綾城具氏)로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문정공(文貞公)이신 휘(諱)가 의(禕)의 따님이다. 선생(先生)은 고려충숙왕(高麗忠肅王)(1332) 임신(壬申) 7월 27일 지금의 밀양시(密陽市) 부북면(府北面) 삽포리(鍤浦里) 향제(鄕第)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의기(義氣)가 영걸(英傑)하고 효우(孝友)는 타고난 성품(性品)이었다. 성장(成長)하면서 배움을 좋아했고, 27세에 입지잠(立志箴)을 지어 학문(學文)의 뜻을 세웠고, 또한 지신잠(持身箴)을 지어 수신지도(修身之道)를 깨우쳐 학문(學文)에 근본을 세웠다. 공민왕(恭愍王)때 등과(登科)하여 한림문학(翰林文學)을 시작으로 예부시랑세자이부(禮部侍郞世子貳傅) 겸 중서령(中書令)을 역임했고 까지 세조정을 섬기었다. 외직(外職)으로 나가서는 북(北)으로 동북면(東北面) 도지휘사(都指揮使)인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상장(上將)으로 호적(胡賊)을 정벌(征伐)하여 전공(戰功)을 세웠고 남(南)으로는 전라, 경상도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성계(李成桂)의 막하에서 왜구(倭寇)를 물리쳐 전공(戰功)을 세웠기로 당시 사람들이 장상(將相)의 재목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선생(先生)은 당대 명유(名儒)이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목은 이색(牧隱 李穡),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이우당 이경(二憂堂 李瓊) 등과 함께 도의지교(道義之交)를 하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고려말에 울연(蔚然)히 군기(群起)한 명유군성(名儒群星)의 한 분이다. 그러나 고려(高麗)가 국운(國運)이 다하여 정사(政事)가 날로 어지러운 것을 보고 선생(先生)은 표연(飄然)히 벼슬을 그만두고 아우 천경(天卿)과 더불어 밀양 향리(密陽 鄕里)로 돌아와 두문(杜門)하고 마을 어귀에 솔(松)을 심어 마을 이름을 송계(松溪)라 고치고 휘(諱)를 익(翊)이라 바꾸며 스스로 송은(松隱)이라 자호(自號)하고 시서(詩書)로 마음을 달래고 세월을 보냈다. 몸은 비록 향리(鄕里)로 돌아왔지만은 고려의 상징인 송경(松京)과 송악(松嶽)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포은 선생(圃隱 先生)과 목은 선생(牧隱 先生) 그리고 야은 선생(冶隱 先生), 이우당 선생(二憂堂 先生)이 송계(松溪)로 선생(先生)을 방문(訪問)하여 시(詩)로서 서로의 정회(情懷)를 나누기도 했다. 시문재문집(詩文載文集) 고려 사직(高麗 社稷)이 위태함을 보고 선생(先生)은 포은(圃隱), 목은(牧隱). 야은(冶隱), 도은(陶隱)과 더불어 손을 잡고 통곡하면서 「시국(時局)이 이미 이와 같음은 천운(天運)이다. 그러나 하늘엔 두 해가 없고 신하(臣下)에겐 두 임금이 없다.」 하였다. 포은 선생(圃隱 先生)이 죽기를 맹서(盟誓)하던 날 선생(先生)을 불러 울면서 「삶은 이 세상(世上)에 붙여 있는 것이고 죽음은 저 세상(世上)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록 천명(天命)이라 하나 나는 홀로 우리 임금의 앞에 돌아가거니와 나를 알아 줄 사람은 이에 박익(朴翊)과 길재(吉再)와 이색(李穡)이다.」 하였다. 선생(先生)이 이르기를 「나도 맹세코 이씨(李氏)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 하니 여러 현인(賢人)이 크게 말하며, 「박공(朴公)은 참 의사(義士)이다. 그는 고죽군(孤竹君)의 아들과 같은 절개(節概)가 있음이라.」고 하였다. 이태조(李太祖)가 등극(登極)하여 도읍(都邑)을 정하자, 왕폐(王幣)를 보내고 은전(恩典)이 있었으나 선생(先生)은 눈 멀고 귀 먹은 맹오(盲聱)이라 핑게하고 이씨(李氏)의 폐백(幣帛)을 받지 않았다. 예관(禮官) 권양촌(權陽村)이 돌아가서 보고(報告)하기를 「박익(朴翊)은 왕폐(王幣)의 소중(所重)함을 돌아보지 않고 죽음을 사는 것 같이 여겼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박익(朴翊)의 충절(忠節)은 일찍부터 내가 아는 바이다. 비록 내게는 순종(順從)하지 않으나 이에 왕씨(王氏)의 옛 신하(臣下)이다. 내 어찌 탓하랴. 「과연 노중연(魯仲連)과 개자추(介子推) 같은 무리이다.」 하였다. 전후(前後)하여 공조(工曹), 형조(刑曹), 예조(禮曹),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좌의정(左議政)으로 다섯 차례나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두견(杜鵑)을 읊은 시(詩)에 「촉국흥망이 네게야 무슨 관게랴. 누구 원수(怨讐) 갚으려고 피나게 우느냐. 높고 넓은 하늘 땅 길잃은 사람 달지고 꽃도 지고 적막한 생각.」 이라 하였고, 또 회포를 읊은 시(詩)에 「일편단심으로 구름 천리 그 얼마나 바라봤던가. 덧없이 달지는 새벽까지 피 눈물짓네. 곁에 있는 사람들아 흉하고 망한 일을 묻지 마소. 산에 놀고 물에 노니 한 세상 족하다오.」 하였다. 태조(太祖) 7년(1398) 무인(戊寅)에 병(病)이 위중(危重)해지니 네 아들에게 유언(遺言)하여 「나는 왕씨(王氏)의 혼령(魂靈) 앞에 돌아가거니와 너희들은 이씨(李氏)의 세상(世上)에 있다. 이미 남의 신하(臣下)로 되어 충성(忠誠)을 힘껏하라.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에 부자(父子)간에도 시대(時代)가 달라졌다.」 하였다. 무인(戊寅) 11월 27일에 고종(考終)하니 향수(享壽)가 67이었다. 밀양군(密陽郡) 청도면(清道面) 고법리(古法里) 소고야간좌원(所古野艮坐原)에 예장(禮葬)하였다. 정종 원년(定宗 元年) 기묘(己卯)에 변춘정 계량(卞春亭 季良)이 조정에 청시(請諡)하여 충숙(忠肅)이라. 시호(諡號)가 내렸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綠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으로 증직(贈職)되었다. 다음해 경진년(庚辰年)에 예관(禮官)을 보내서 치제(致祭)하여 사제문(賜祭文)에 이르기를 정절전심(貞節專心)하고 임란불이(臨亂不貳) 하였으며 명륜진도(明倫盡道)하여 입인지기(立人之紀)라.」 하였다. 포은(圃隱)이 선생(先生)의 화상(畫像)에 시(詩)를 써서 「긴 수염 십척장신 그려내었네. 볼수록 두 모습 같기도 하이. 인생(人生)무상 자취없다. 이르지 말게. 사후(死後)에도 안죽는 사람 그냥 있겠네.」 하였고, 야은(冶隱)이 차운하여 「봉의 눈 범의 눈섭 십척장신에 홍안반백 두 얼굴 같기도 하이 그림으로 선생 모습 살펴보자니 죽지 않은 정신도 그 속에 있네.」 하였다. 야은(冶隱)이 또 찬(贊)하기를 「정신(精神)엔 별과 해가 빛을 드리웠고 기상(氣象)은 산과 바다 정기(精氣)가 뭉쳤다. 강상(綱常)을 붙들어 심으니 천재(千載)에 우뚝하였다. 거룩할 손 덕스런 얼굴이여, 이학(理學)의 으뜸이었다.」 했고 춘정(春亭)은 차운하여 「천재(千載)의 으뜸이고 백세(百世)의 스승이다. 학문(學文)은 염락(濂洛)을 따랐고 문도(門徒) 추로(鄒魯)를 이루었다.」 하였으며 황방촌(黃尨村)이 묘표(墓表)에 찬하기를 「정충탁절(貞忠卓節)이 모두 이학(理學) 정교(正敎) 아님이 없더라.」 하였다. 이것이 천고(千古)에 길이길이 빛나리라. 대저 이치(理致)의 나타남과 숨겨짐도 또한 시기가 있는 것이던가 4030여년이 지난 순조(純祖) 32년(1832) 임진(壬辰)과 을미년(己未年)에 선생(先生)의 유고(遺稿)와 영정(影幀)이 잇달아 나와 유적(遺蹟)이 세상(世上)에 환하게 밝았은즉 하늘의 뜻이였던가 이와같이 신기하였다. 문적(文蹟)이 발견(發見)된 다음해인 계사년(癸巳年)(1833)에 밀양(密陽)의 유림(儒林)이 덕남서원(德南書院)을 창건(創建)하여 선생(先生)을 주벽(主壁)으로 영정(影幀) 봉안(奉安)하고 우당(憂堂) 인당(忍堂) 두 아드님을 배향(配享)하였고 을미년(己未年)(1835)에 청도(淸道)의 유림(儒林)이 용강 충렬사(龍岡 忠烈祠)를 창건(創建)하여 선생(先生)을 주벽(主壁)으로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고 후손(後孫) 임란공신(臨亂功臣) 14의사(十四義士)를 종사(從祀)하였다. 헌종(憲宗) 5년(1839) 을해(乙亥)에 단성(丹城)의 유림(儒林)이 신계서원(新溪書院)을 창건(創建)하여 선생(先生)을 주벽(主壁)으로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고 아당(啞堂), 졸당(拙堂) 두 아드님을 배향(配享)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