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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죽파(湖州竹派)의 문인화가들이 기반을 다져 후대의 문인화가될과 선승(輝f합)들이 여기(餘技)로 즐겨 그리게 된 것인데 고려시대의 예로는 관경변상서품도(觀經變相序品 圖)의 부루나존자(富樓那尊者)의 뒷편 두쪽 병풍에 보이는 것이 유일하다.27) 박익 묘의 매죽석도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원대 문인 묵죽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 다. 그러나 박익 묘의 매죽석도를 과연 문인화가가 그린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문 인이 무덤에 벽화를 그리는 것은 문인정신에 어긋나는 일이어서 상정하기 어렵다. 당 시의 문인이나 선승들이 그리던 문인화를 익히 알던 직업화가가 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일 듯하다. 또한 박익 묘 벽화의 인물풍속화를 그린 화가가 이 매죽석도도 함께 그렸던 것인지의 여부는 현재로서는 단정할 길이 없다 박익 묘의 대나무 그림과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이 일본에 건너가 활약한 조 선초기의 화가 수문(秀文)이 그린 「묵죽화책(뿔竹畵冊)J 의 대나무 그림들이다(圖30).28) 박익 묘의 벽화는 1420년에, 수문의 작품은 그보다 불과 4년 뒤인 1420년에 제작되어 둘다 동시대 작품들인 것이다. 조선초기에는 대나무 그림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서 화원을 시취(試取)하는 데에 있어서도 일등 과목으로 채택하였었다.29) 수문의 작품이 뛰어난 것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수문의 화첩 그림들 중에서도 제1엽의 작품이 잘 비교된다(圖30).30) 두 개의 바위가 솟아있는 평지에 자리한 대숲을 내려다 본 상태로 그렸는데 介자 모양의 대잎들 표현 이 박익 묘의 대잎들과 어느정도 유사하다. 수문의 작품이 훨씬 세련되고 다듬어지고 숙달되고 다양하지만 박익 묘의 그림과 수문의 작품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대적 공통 점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27) 李東洲, r高麗까畵J , 圖2의 하단부분;행竹淳-. 鄭千짧, 「高麗l냄代의 1?r,畵J (시공사, 1996), p.291, 圖 53;안휘준, r한국 회화사 연구J , pp.281,282 참조. 28) 安輝溶, r韓國 · 朝빡 前半期의 *용畵J , 東洋의 名畵1(三省出版社, 1985), 圖31 -34; 熊양宣夫, 「秀 文筆뿔竹畵冊」, r國華」 第910號(1968, 1), pp.20- 32 참조. 29) 安輝溶, r韓國續畵셋J (一志社, 1980), pp.l21- 123 참조 3이 註28, 東洋의 名畵l의 圖31 참조. - 1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