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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誌石은 홍의 남쪽 護石의 지대석 내부에 깔아둔 판석상의 자연석 아래에서 발견 되었는데, 장방형 石材 2매를 양쪽에서 鐵뺨로 묶은 다음 수평하게 매납된 상태로 확 인되었다 상하 동일 규격을 가진 것으로 1매의 길이 44cm, 폭 27cm, 두께 8.5cm, 무게 29kg이다 그 중 상부의 것은 글자가 없고 하부의 것 내변에만 새겨져 있는데, 상부 것 은 蓋石이라고 생각된다. 銘文은 장축을 따라 維書로 음각되어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 으로 위와 같이 5열 배치되어 있다 誌石의 내용은 간단하다. 무텀의 주인공인 박익의 官階 朝奉大夫와 官職 司宰少藍, 아들 4명과 사위 2명의 이름을 쓴 다음 장자지낸 연월일을 기제한 정도이다. 더 자세 한 幕誌石이 있을 법하나 찾지 못했다. 이 誌石대로라면 박익이 역임했던 최고 관직은 司宰少藍이었다. 족보에는 박익의 셋째 아들이 調로 기재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빠으로 되어 있다 뒤에 改名했을 수도 있겠다. 문제가 되는 것은 ‘永樂康子=月甲寅舞’이다. 永樂康子年, 즉 세종 2년(1420) 2월 갑 인일에 장사지냈다는 것이다 이 때 장사지낸 것이 사망한 직후라면, 족보나 문집에서 전하고 있는 사망한 해와 22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박익은 67세가 이-니라 89세에 사망한 것으로 된다 결과적으로 황희가 쓴 幕表는 거짓인 셈이 된다. 세종 2년에 사망 한 것이라면 생년도 문제가 될 수 있다 89세에 사망했다는 것은 당시 평균 수명을 고 려하면 드븐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박익이 55세 되어서야 종5품직인 동경판관 을 역임했다는 사실이 의섬스럽다. 그런데 황희가 쓴 묘표에는 박익의 무텀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i좁道휠ß 西面 素古野 良坐原에 合封한 무텀은 前朝 충신 예부시랑 겸 중서령 松 l떻朴公 證天翊과 貞敬夫A 星山裵民 賢輔의 딸을 장사지낸 곳이다,55) 위의 기록에서 의심스런 데가 두 곳 있다 ’西面’과 ’貞敬夫A’이 그것이다 조선 정 종대라면 아직 面里制가 정착되지 않은 단계인데, 이렇게 표현했다는 점이고, 정경부인 은 정 1품 관료의 부인에게 주는 호칭이라는 점이다. 박익에게 조선건국 후 좌의정이 추증되었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호칭되었을 수는 있겠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청도군 소고야에 있는 무덤이 박익과 그 부인 성주배씨의 合封 55) ~松隱先生文集』 권 2, 훌表 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