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願得淸風明月慣 百年與爾死生期 청풍명월을 빚으로라도 얻을 수 있다면, 백년을 그대와 사생을 기약하고 싶구려. 이색은 당시 유배 중에 있어서 활동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아마 유배에서 풀리 면서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에 밀양을 방문하여 박익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이색도 중앙의 정계 변화를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박익에게 귀경하여 함께 활동 할 것을 제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위 시에서 ’그대와 사생을 기약하고 싶다’는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정몽주와 이색의 권유로 박익은 서울로 올라가 예조판서로 복직되었다. 박익 이 복직되었을 때 정계는 이성계세력에 대한 정몽주세력이 공세가 대대적으로 전개되 고 있었다. 공양왕 3년 11월 정몽주 중심인물로 인사개편을 단행한 후, 이성계세력에 의해 숙청되었던 이색 등을 복권시키고 있다. 공양왕 4년 초에는 이성계세력에 대한 탄핵을 시작하여, 4월에 이성계의 핵심세력인 趙浚 · 鄭道傳 · 趙殘 · 尹紹宗 · 南在 · 南 開 · 吳思忠 등을 모두 삭탈관직하고 遠地로 유배시킴으로써 타격을 가하고 있다. 이성 계세력으로서는 위기상황이었다. 박익은 이같은 정세 속에서 정몽주세력으로서 함께 활동하면서 이를 직접 경험하고 있었다. 그것은 皇南仁이 지은 ‘遺塊神造碼續誌、’에서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다. 고려사를 살피건데, 王申年(공양왕 4년) 4월 사헌부애서 조준 · 정도전 퉁을 탄핵 할 것을 청하였다. 선생은 이 때에 예조판서로 있었는데, 사건이 지난 다음 司宰앓 ïE 鄭路에게서 그 사실을 들었다.48) 박익은 정도전 등에 대한 탄핵 사실을 뒤에 가서야 정몽주의 아틀r인 鄭距‘에게서 들 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탄핵을 박익이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정 몽주세력으로 활동했던 그가 이 사실을 몰랐을리 없을 것이다. 이성계세력을 숙청하는 일정을 협의하는 자리에 박익도 참여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봉주세력의 공세로 이성계세력은 절박하게 위기상황을 맞게 되었다. 그 핵심 인물 들이 거의 제거된 셈이기 때문이다 이성계파는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정몽주 암살이 48) r按麗史 王申四月 臺府之請按超浚鄭道{잭等 光生 l방寫퍼뿔‘0 事過 司宰藍mm훨與閒馬J(r松隱先生 文集」 권 2, 遺據꾀lþ道뼈續誌) - 1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