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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 때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한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5만 내지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이뤄졌으며, 1939년 4월에는 1644 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화민국 정부는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중경)을 임시수도로 정한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난징을 삼면에서 좁혀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속에 중국 국민당 주요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손을 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이전에 약 110만 명에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피난들어오는 피난민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난징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는 경고를 했다. 그러나 난징을 지키고있던 탕셩즈 사령관 휘하의 15만 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 거부했다. 중국군의 당시 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성 안에 고립한 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 방식으로 나가려했었다.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결국 역시 중국군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중국 군대가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흐뜨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안되었던 것에 큰 한 몫을 했다. 결국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본 채로 뒤숭숭한 혼란속에 빠져있기만 했다. 그 무렵,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했다. 여기서 피난가지도 못한 채 남아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 상태속에서 4~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학살을 당한다. 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