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page

(영수증)등을 보관하였고 전남·전북으로 나누어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였다. 전북에서 오오득, 김 종철, 김경환, 조순식이 활동하였고, 전남에서는 박영관 선생을 비롯해 정기환, 송시용, 오석완, 조 인현 등이 각기 임무를 분담하여 활동하였다. 위 9동지는 전남의 광주, 여수, 목포, 순천 , 장흥, 보 성, 곡성, 장성과 전북의 전주, 이리, 남원, 김제, 임실, 군산 등지에서 찬조 받은 군자 금 3만원을 1차로 임시정부에 보내는데 성공하는등 1928년 초까지 총 금7만5천원을 상해임시정부 대한통의 부에 송금하였다. 항일학생운동의 불을 지피다. 조인현씨를 필두로 함께 3년 넘게 이리, 김제 등지에서 성공적으로 공작을 전개하며 활 동해오던 차, 1927년 초 대대적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조국을 수립하기위한 군자금 모집을 목적 으로 중대 한 계획을 세웠다. 일제의 착취기관인 동양척식회사 지점을 비롯한 관공서, 은행, 등을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기로하고 모종의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였다. 爆彈(폭탄)기술사까지 초 빙하여 폭 탄을 제조하는 등의 실행방법을 계획한 후 외국과 연락을 취함과 동시에 상해에서 탄환 과 권총을 밀수하야 각 지방에 배치하였다.<1930.03.04. 동아일보 2면 사회 기사> 이 사건은 국내에서 조직공작을 통해 무력 투쟁을 전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전라남·북 도는 물론 전국 각 지방에 걸쳐 큰 자극을 주었다. “조인현은(조인현,박영관,오오득,전기환,김종철,송시용,오석완,정기환,조순식)은 3년 동안 이 리, 김제 등지에서 공작을 전개하며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착취기관인 동양척시회사 지점을 비롯하 여 관공서를 습격할 목적으로 폭탄을 제조하고 총기를 수입하는 등 광주항일학생운동에도 크나큰 영 향을 미치게 되었다.(초등6학년 사회 1학기 교과서, 대한민국의 발전,광주학생운동)” 이 사건은 서기 1928년 6월 2일 왜경에 발각되어, 조인현을 비롯해 9동지가 피포 되었고 , 이중 선 생은 1928년 6월 4일 체포되어 1930년 10월까지 2년 4개월 간 옥고생활을 하였다. 이 사건이 유명한 전북 이리 폭발탄 사건으로 1928년 당시 동아일보에 대서특필대사건 으로 기제 되어 공판 때마다 법원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독립운동 가들에게 독립운동활동에 더욱더 자신감을 주었으며, 확산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나라의 기본은 가족, 일가를 이루다. 선생께서는 1919년 3월 15일부터 1928년 6월 4일까지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 30년 10월 까지 옥고를 치루고 만31세에 출감하셨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