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page

선생의 (字)자는 永寬(영관) 號(호)는 松窩(송와)이며 본은 密陽(밀양)으로 전북 고창군 무장면 도 곡리 284번지 박경삼과 설명일의 셋째 아들로 서기 1899년 7월 7일 출생하셨다. 선생의 나이 3살 때 어머니를 여의셨으며, 16세에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은 남다른 효행과 총명함, 강인한 체력과 인내력을 지닌 장부로 성장하여 정의와 의 협심이 남 다른 분이셨다. 선생은 1919년, 20살 되던 해에 <일제헌병통치> 10년 동안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던, 일 제의 극악 무도한 만행과 핍박 그리고 수탈을 보면서 이 한 몸 받쳐 반드시 국권을 회복해야겠다 는 강한 다 짐을 하신다. 전국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의 한가운데 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듯이, 드디어 1919년 3월 전북고창군 무장면 도곡리 선생의 자택 에서 중앙 에서 온 예수교 선교사 송주일씨와 밀회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서울 에서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태극기 300여개와 3월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온 무장읍 내 유지 김 영완씨로부터 입수한 독립선언서, 국민휘보, 조선독립가등을 학교 등사판에 다수 복사하 여 은밀히 보관하였다. 드디어 1919년 3월 15일 오전 11시를 기해 고창군 무장 읍내와 동명보통학 교에서 무 장읍내 유지와 지식층들이 함께 일어나 일제히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박영관 선생은 동 명보통학 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동명보통학교와 무장학교 의 학생과 민간인 약 400명이 참여한 거사였다. 선생은 급히 출동한 왜경에 붙잡혔으나, 왜경의 눈 을 때려 그 가 실신한 틈을 타 도주하였다. 그 후 1923년 3월까지 5년 동안 朴鐘寅(박종인), 朴性 永(박성영) 등 가명을 사용하면서, 상해임시정부와 전라남·북도를 오가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지폐 를 만들고 동지를 규합하며 再期(재기)의 機會(기회)를 준비하였다. 조국을 수립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으다. 선생은 1923년 3월 하순경, 목포 관해여관에서 상해 임시정부 대한통의부에서 파견한 조인현씨를 만나 밀회하고 통의부에 가입하였다. 박영관 선생은 오석완씨 등과 협력하여 전남 장성 군 삼서면 두월리 947번지를 은거지로 정하고 활동에 필요한 권총1정과 실탄 28발, 請求書(청구서 ), 嶺數證 생애(生涯)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