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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순은 전남대 76학번으로 자신의 학교 선.후배들을 모집해 '들불야학'을 만들어 광주지역 민중운동을 주도했다. 윤상원은 당시 박기순의 권유로 들불야학 교사로 참여했다가 광주민주화운동에 투신했는데, 1978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박기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 왜 말없이 눈을 감고만 있는가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이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 늘 서럽도록 아름다웠지" 라는 시로 표현하면서 그리워했다고 한다. 한편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을 위해 소설가 황석영 씨는 1981년 '전두환 군홧발 정권'의 감시를 피해 자택에서 김종률, 전용호, 오정묵 등 광주지역 문화예술인 10여 명과 함께 윤 씨와 박 씨의 영혼을 기리고, 오월 항쟁을 추모하는 노래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이후 황 씨는 시민사회운동가 백기완 씨의 옥중 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차용해 가사를 썼고, 당시 전남대 학생이던 김종률 씨가 작곡해 완성했다. 드디어 이듬해 2월 20일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윤 씨와 박 씨의 영혼결혼식이 열린다. 이들은 ‘넋풀이’ (노래굿)로 그동안 숨죽여 만들고 녹음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출처 : 아시아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