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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지역 항일독립운동사 여수는 일본과 가까워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 고려말 유탁 장군의 승전, 조선 중기 이대원 장군의 손죽도 해전과 임진왜란때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라좌수영, 본영,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 영민 승병들이 힘을 모아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한 구국의 성지이다. 조선 말기 국운의 몰락 속에 우리지역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여수는 한말 호남의병의 최후의 격전지였다. 김성택, 이병현, 강진원, 정기채가 1908~1909년 의병활동에 몸 바쳤다. 여수에서 의병 투쟁이 40회 이상 교전을 벌였을 만큼 치열했으며,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독립의군부를 조직한 임병찬은 거문도에 유배되었다가 1916년 순국하였다. 여수출신인 김백평, 이형영은 1919년 3월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정두범, 김철주, 윤형숙, 박오기는 3월 10일 광주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3월 2일 윤자환이 여수경찰서 게시판에 독립선언서를 부착한 사건이 일어나 일제의 경계가 삼엄한 가운데서도, 4월 1일 쌍봉, 소라, 율촌면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여 4월에만 여수군의 7개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귀향한 유봉목이 여수수산학교 재학생 이선우 등과 보통학교 졸업생들을 설득하여 1919년 12월 20일 13시 여수장터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였으나 19일 일경에 적발되어 시위계획이 불발되었고, 배세동은 3월 20일 김제장터에서 유봉승은 4월 3일 남해 장날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3년 2월, 소라면에서 일어난 전국 최초 면장 민선운동은 일제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당시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어 전국적인 이목을 끌었으며, 이에 자극받아 1930년대까지 여수와 전국에서 면장 민선운동이 활발학 전개되었다. 문 균은 1928년 7월 구례에서,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앞장 선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노병주, 전남사범학교의 곽찬신, 그해 12월 서울 중동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한 김형석 등도 여수출신이다. 오우홍, 김인식, 장평완, 김용환, 이창희가 주동해 1928년부터 5년 동안 진행되었던 여수적생노동조합사건(1933년 8월)과 윤경현, 백인열, 곽재석, 정보한, 정학조, 진자미, 오놀보가 주동한 1930년 3월 여수수산학교 독서회사건, 그해 4월 원정상, 원종삼, 이효동이 주동한 거문도 야학사건과 이와 연계한 김귀문, 최풍룡, 유재성이 주동한 부산제2상업학교 호남학우회사건, 1938년 5월 12일 동경유학생 최석규의 관여(시모노세키~여수) 연락선 창복호 선상사건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내선일체라는 미명하에 동아, 조선일보를 폐간하고 우리말과 글도 못쓰게 하고 성과 이름도 일본식으로 강요당했던 1940년대에도 항일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여수의 장로교인 강병담, 김순배, 손양원, 이기풍 등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였고, 최완규, 이상문은 일본 유학중 독립운동을, 윤 장은 1941년 12월 항일 비밀조직 무등회를 가입해 학병반대우동을, 김충홍은 1942년 여수수산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교사의 모욕적인 처사에 분개하여 투쟁하다가 옥고 후 광복군에서 활동했고, 김초암은 1942년 종방 전남공장에서 징병거부투쟁을, 1943년 9월 14세 소년 주재년은 조선독립을 주장한 글과 말을 유포했다. 이처럼 여수에서는 1900년대부터 항일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어 조국의 광복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