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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과정애 소위 한새들(지하狀)에서 공비들과 전투가 시작되어 하 루몽안 전투를 하다가 국군2명이 전사를 하였으나 진사한 군인들 을 후송하지 못하고 후퇴하는 결과가 발생하였으며, 2일후에 시신 을 운구하게 되는 슬픈일 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사망한 군인은 故 김추길 일병(경복 영천시 고경띤 해선리 50번지; 호주 金π德의 자; 보훈번호 제056113호)과 부산에 거주 하는 또 한분의 군인이 있었습니다. 이 에 5중대장 권준옥대위 는 인근지역 주민들이 공비와 내통한 것으로 생각하고 2명의 국군이 사망한 보복차윈에서 양민학살을 시작한것 같다고 당시에 학살에 참여한 생존군인(당시 3소대 분 대장 양영언;제주 거주자)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지서장이었던 故 이계필의 숭언서와 당시 월야지서 직원으르 순경이었덴 오장언씨의 중언을 보아도 하루에 50명씩 학삼하랴는 작전명령이 있었다는 군경합동회의 사항을 증언하는 경우를 뢰-아도 억울-한 죽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선무꽁작대 통3면(나신-떤,해보면,월야면)의 파견대장 을 역임한 故 윤인식씨 (7,8,9,10대 국회의원 역임)의 증언서플 보 아도 공띠를 색출하거나 공비에 협럭한자를 색출히·지도 아니하고 15세부터 45세 사이의 사람을 남녀를 괄문하고 학살한 경우흘 보 아도 양민을 학살한 증가 라 하겠습니 다. 당시에 5중대장 연락병으로 남산되 양민학살에 참여했던 김일호 일병 (69세; 제주시 연동294-51-101호 'ft746-1732)의 증언에서도 학살윤 증언하고 있으며 학살현장애서 김연호에 의하이 살아난 - 4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