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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증스러운 만행은 사망자릎 확인 사살하였다나 이는 적군에게도 할 수 없는 잔학한 행위였습니다. 또한 5증대 군인들은 학살대상자를 별도보 골라낸튀 어린이와 노인들에개는 소재지로 피난을 가야하니 따 을에 불을 지르도독 하여 집뿐만 이-니라 당시 집마당 에 쌓아논 벼 벗단을- 쏘두 불태웠다는 것입니다. 윤인식(선무공작대장 :7, 8, 9, 10대국회의원)과 정일웅­ 은 당시 군인들이 다래기 (나항 7마을의 속명)주민을 학살한 것은 10.2일 한세 들 전투에서 패배한데다 미­ 을뒷산에 봉화가 피워지니 다래기사람들이 한새 틀전 투에 가담했거나 빨치산을 도왔다고 오판했음이 분벙 하다고 증언하고 있어 5중대의 군인들이 비이성 적인 정신착란 상태에서 이 루어졌음을 중언하고 있다. 다. 다래기의 학살이 자행된 2일후인 1950년 10월 30 일(음력)에 5중대병 력의 일부가 외치마을을 점령히·여 18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현장에서 1 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17명은 해겐-면 꽁몽묘지에서 학살을 했습니 다. 당시 빨치산블은 국군의 통행방해 를 위 해 야간을 이용해 도로 곳곳을 파해 쳤는데 이같은 일을 외치마 을 주민들의 소행으로 간주해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딩-시의 생존자들은 증언히·고 있습니다. 불구자 흉내를 내서 살아난 정기석씨 (69)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전 1 0시에 꾼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구도로가 있던 외 치 제 로 모이게 한 후 느닷없이 몸집이 큰 이계주 (24세) - ,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