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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학실 희샘자 잉여1회목을 위한 정뭔 당시 16세의 소년£로 이날의 현장을 똑똑허 지켜보았다는 곽상일씨 (59세)는 동 촌앞뜰 속칭 무명씨 바위에 기관총을 장착해 놓고 국군의 지시로 모여 들고 있는 양 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가하여 모두 블살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동촌마을에선 젊은 남자틀만을 골라 살해했으나, 이웃마을인 장교리에서 는 냥녀노소를 가려지 않고 사격을 가해 20여명을 죽였다고 강영주할머니(71 세) 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강영주할머니는 그날 다섯살난 아이를 잃고 자신과 등에 엽 힌 애는 총상을 입는 피해를 당했습니다 이러한 증언들은 당시의 희생자들이 무고한 농민플이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 니다, 동촌마을에 사는 곽상태씨(문장신협 상무)는 당시 형이 전쟁에 나가 전사한 군인가족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부친이 살해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어 학살이 아무런 기준도 없이 무차렬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2. 함평양만학살사건의 최대의 희생자는 월악랴 지변, 내동. 순촌, 송게, 괴정 , 성주. 동산마을 등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국군틀이 동촌, 장교마을에 업성해 보력-살인을 감행하던 날 공비들이 외곽으로 피했다가 밥이 되자 마을뒷산이l 봉화를 을렀는데 10월 27일(음력) 저녁 월악리뒤에 있는 윌악산에도 봉화를 펴운 사건이 발생하였 습니다. 1 0월 28일(음력) 5중대는 7개마을의 사랑들을 모두 모이라고 하여 대략 700여 령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증에서 15~40세까지의 사람즐(낭냐)을 모아서 마을로 부터 300여미터 떨어진 남살려(남산)으로 끌고가 기관총을 난사하여 모두 학살하 였는데 이 떼의 후l 생자가 1 30여명에 이설 있습니깐 이러한 학살이 빨치산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양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졌r:}는 증언 이 많이 있습니다. 당시 송장더미에 깔려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던 정연옥씨 (65)는 군경가족이 있으변 나오라고 하여 방위군 소대장이던 정병오씨(당시 25 세)가 일어나서 이야기하기를 ‘나는 방위병 소대장이며 현재 닥오자이다’ 라고 말하 고 방위군증명을 제시하였으나 중대장 권준혁은 “이시lη1"라는 말 한마디만을 한 채 권총을 뽑아 정병오씨의 가슴에 총을 쏟았는데 총을 맞-은 후에도 죽지않은 정병오 씨는 비틀거린며 두말자국 앞으~로 걸i며 ‘대한민국 만새”를 서l번 블렀고 그 순간 중대장은 다시 권총 두말을 더 쏘아 죽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정일웅씨 (69세)는 당시 사망자들은 순수한 양민알 뿐 빨치산은 커녕 부역자 한명 도 없었다고 술회하면시 그 증거로 당시 사망했던 징방섭씨의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당시 정방섭씨는 국민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그동안 집안 아궁이에 숭어 있디가 부친 - 474 -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