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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진상규명을 위한 유축틀의 노력 가) 수 개월에 걸쳐 합평군 ztÄ]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한 이 사건은, 같은 제11사단 예하 부대가 일오킨 거창사건과는 달리, 언톤에도 전혀 보도되지 않았습 니다. 또한 유족들이 이 사건을 기억하는 것마저 위협하고 불순한 일로 취급되어 유족틀과 생존자들은 생존울 위해 입을 굳게 다물어야 했습니다. 나) 4. 19 이후 그러나 4.19 이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사회전반의 민주화 요구가 솟구쳐 올 랐고, 거창, 함양, 부산 동 각지의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동시에 일어 났습니다. 남산되 학살에서 잘아남은 소외 정일웅(월야면 월악리) 퉁 함명학살사 건의 유족 및 생존자들도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각계에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60. 5. 23. 제4대 국휘에서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위원장 최천) 구성이 결의되어, 6. 8. 유옥우, 이사형, 박병배 의원이 함평학살사건의 현 장을- 찾아 진상조사를 히-였고, 이 시건을 “해결해야 할 심각한 양빈학살”로 규정 하였습니다. 진상조시특위가 국회 제 42차 본회의에서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인명피해가 524 명 ( 월야면 350병 사망, 해보면 128명 사망, 나산면 46명 사망) , 가옥 1, 454호 (월야면 1 , 449호, 나산면 5호)가 소실 (전소 880호, 반소 108호) 되거나 파손 (전 따 260호, 반파 201호) 된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그 책임자로 권준육 대위가 지목 되어 있습니다(갑제1호증 중 33쪽 , 35쪽 국회속기록 참조) . 함평 사건 외에도 각 지역에 대한 조사를 끝낸 후 1960. 6. 21. 민의원은 만장일 - 3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