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률은 불을 끄러 가라”고 하여, 일어나 마을로 뛰어가는 주민률을 또 사살하고, 확 인 사살까지 하여 200여 명을 학살하였슴니다. 사망자 중에는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정방섭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부친 정 통욱으로부터 “교편 잡는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나가 보라”는 말을- 듣고 나갔 다가 사살당하는 동(갑제8호중 월간예향 참조), 학살당한 대다수 주민들은 도망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슴니다. 그런데도 제5증대는 아무런 객관적인 증거 없이 이틀을 부역자, 통비분자로 간주하고, 죽지 않은 자는 살려준디-는 말로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을 노리개감으로 삼아, 수 차례의 거짓말을- 동원한 일제 사격과 확인사살까지 하여 줘요한 학살극을- 벌인 것입니다. 3) 학살현장에서 죽은 사람 밑에 깔허 있다가 살아난 따을 주민 양채문 (당시 17 세)은, 당시 200명이 학살당했으며, 15세 띠만의 아이들은 군인들이 시켜 무서워 서 집집마다 방호}를 하였다고 증언하고 있고, 정남숙 (당시 22세)은 7 발의 총상 을 입고도 살아났으나, 현재까지 그 총상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갑제3호증 중 제120, 121쪽 사실확인서 참조) . 또 당시 권준옥의 연락병이었던 김일호는 학살될 예정이었던 주민툴의 대열에서 학생 신분인 정 일웅을 불러내 생명을- 건지게 한 사람으로서, 학살현장에서 전 과 정을 목격하였으며 위 내용이 모두 진실이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갑제1호증 중 150쪽 편지 참조) . 국방부 정훈국 소속 합병지역 선무공작대원 겸 등삼면 (나산, 해보, 월야) 파견 대장이었던 윤-인식(전남도의회 제1 , 2데 도의원 빛 제7, 8, 9, 10대 국회의원) 역 시, 남산되 학샅 현장에서 30여 미터 떨어진 언덕 녀머 지점에서 부녀자틀을 따로 - :~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