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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하고 주둔하여 공비토벌 작전을 벌이면서 1950.11. 5. 금덕리 사자퉁에서 3명 을, 1950.11. 10 웰야면 용정리에서 1명을 학샅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아직까지 학 살의 과정, 방법 동에 관하여 기록으로 정리되어 있는 자료는 없으며, 유족들의 주장에 근거한 것이므로 목격자와 객관적인 자료틀에 의하여 윗받칩되는 아래의 학살 사건들과는 입증의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5중대는, 1950.11. 27. 함명군 월야면 외치재(광산군과의 경계를 이룹) 초소에서 경 계 근무를 하헌 증 광산군 본량변 덕 럼 리 북-만 부락에서 주민들이 주막에 오가 는 것을 보고서 북만 "부락에 들어가 주민 8명율 붙잡아 초소에 데려왔는데. 그 중 한 명이 외치 마을 주민임을 확인하고서는 풀어주고, 나머지 7명은 학살하였습니 다(갑제1호중 중 제85쪽 희생자명단). 또한 갇은 날 월야리 가마소에서도 정창기 (당시 세무서직원) 등 4명을 학살하였습니다(갑제1호증 충 제84쪽 희생자 명단) 고 1950.11. 29 해보면 금덕리 산11번지에서 I명율 학살하였으며 1950. 12. 2. 중대본부에서 장성군 삼서띤 사창으로 가는 도로를 확보하기 워하 여 행군하다가 함펑군 월야면 계립리 시목· 미을 앞 지하보 부·근에서 굉-비들과 전 투를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추길 등- 2명의 국군이 전사하자(갑제7호증의 1 민 원회신, 2 제적등본 사본) 나) 월야면 정산리 장쿄마율에서의 ‘싹삼 12. 6. (음력 10. 26. ) 새벽, 제5 중대는 장교마을에 들어가 주민 20여 명을 학살 하였습니다. 주로 청장년이 휘생된 동촌과도 달러 , 장교마을에서는 남녀노소의 - 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