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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릅P‘ I톨톨톨.톨톨톨-톨톨톨를-설1f1Ii.’.딛톨힘-- 퍼89.-를톨~----‘ ==t~r-~~~=====← 반과 딩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이 각기 진상을 조 사해 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임을 확인하는 기록을 넘겼다. 사건의 피문을 막기 위해 이듬해 1월7일 신성모국방부장관이 현지에 다녀갔으며, 이후 이 사건은 공비틀이 저지른 것으로 공식 기록에 남아 있다. 90년대 들어 유족회를 결성한 희생자 유족들은 정부에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당시 끔찍했던 사건 현장은 지금도 고스란히 보존된 상태이다. 사건 현장에 유골 50여 구가 아 직까지 방치된 채 발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군 당국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명했지 만, 최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당시 한국 경 찰이 작성한조사보교서와미군이 자체 조사한진 상기록(군사 기밀 자료)이 발굴되었다. 당시 문경 군수(채문식 전 국회의장)와부대 인솔자들 및 현 장 생존자들도 2소대와 3소대가 저지른 만행임을 증언하고 있다 유족회(회장 채의진)는 ’‘명백한 중거가나왔는데도국민의 정부가 해결해 주지 않 으면 헌법 소원을 제기하고 국제 사회에 호소하겠 、 r:}-"라고배수진을치고있다. l 산청 · 함양 • 거창양민 학살사건 한국전쟁 와중인 51년 2월8일부터 11일까지 경 남산청 • 함양 · 거창지역 주민 1천4백24명이 집 단 학살된 사건. 가해 부대는 당시 이 지역에 공비 토벌대로 주둔한 국군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 연대(연대장 오익경)3대대(대대장 한동석)였다. 이 사건은처음에는거창양민 학살로만알려졌 다.3대대가 마지막 이틀( 2월10-11일) 동안 저 지른 거창군 신원면 학살사건만이 당시 임시 수 도 부산에 있던 국회에 제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사저널〉과 유족들의 추적(93년)에 따라 3대대 병력이 산청군 금서변에서부터 거창 군신원면까지 양민을집단학살했다는중거가나 옴으로써 이 사건은산청 · 함양 • 거창양민 학살 로 기록되게 되었다. 산청 · 함양 피학살자는 7백 5명. 거창 피학살자는 7백19명이었다. 당시 3대 대는 지리산 지구 공비 토별 작잔을 벌였는데, 공 비가 깊은 산속으로 은거하자 3개 군 자연 부락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뒤 이를 공비 소탕이라고 보코했다. 역대 정부에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요쿠하던 유족들의 청원이 95년에야받아들여져 국회에서 I 4.19직후재뺀|회부된경북지역학살기해^~들. 68 - 518 - ‘거창 사건 등 관련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거f장사건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전국의 양민 학 살 중 유일하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 사건이다. l 함평양민학살사건 역시 한국전쟁 때 영 · 호남 지역 공비토벌대로 주둔한 11사단이 자행한 양민 학살이다.50년 12 월6일과 7일.51년 l월12일 전남 함평군 월야연 . 해보면 · 니잔연 주민 5백24명이 집단 학살되었 다. 주민을 학살한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인 솔 책임자는 권준옥 대위였다. 함평 학살 사건은 60년 5월23일 민주당 김의택 의원을 조사반장으 로 국회의원 11명이 현장을 찾아 진상 조사를 한 뒤 국회 본회의에 보고하고 .해결해야 할 심각한 양민 학살’ 로 규정했다. 구체적인 내역을 살펴보연, 50년 12월6일 월야 면 정산리 동촌 부락 남녀노소 60명이 마을 앞논 두렁에서 집단학살되었고,다음날에는월야연정 산리 6개 부락 주민 3백명이 속칭 남산외에서 학 휩었다 또51년 1월11일에는해보연샘리모 평 부락주민 1백28명과나산연우치리 주민 46명 이 집단 학살되었다. 당시 5중대는 함평군 불갑산 에 은거한 공비를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출동했다 가 양민 학살을 저지른 후 이를 공비 소탕이라고 보고하고. 농가에서 수거한 낫과 호미 퉁 농기구 를 노획물로 보고했다. 아군이던 방위군은 물론 공비 토벌 작전을수행하던 경찰 가족까지 무차별 학살했다. 5중대의 행위는 군 당국의 작전 명령까지 어긴 것이었다. 당시 하달된 작전 명령은 ‘양민은 부락 에서 평지로소개하고. 농작물은공동 작업으로 수확케 하며 아꾼의 통신망과보급로를 확보하라 는 것이었다. 그러냐5중대는 양민을 학살하고, 농 작불은전부불태웠다. 당시 헌병사령관을 지내고 훗날 육군참모총장 까지 역임한 최경록씨는 공비토별대였던 11사단 의 일부 예하 병력이 집단 양민 학살(산청 · 함 양 · 거창 • 함평)을저지르게 된빼경에 대해사단 장의 작전 지휘 능력과 풍성올 연결지어 회고했 다 "11사단은무리하게 전과를올리는 데 급급해 여자를 겁탈하고 소를 다 잡아 먹고 양민을 죽인 뒤 상부에 공비를 소탕했다고 보고했다. 그때 최 덕선익 11사단에는 이등병이 없었다. 전원이 1계 급 특진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11사단장 최덕신 시사저빌 1999.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