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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사병은 1950년 9월 1일 소집되어 제주도에서 1개월간의 훈련을 받고 육지에 도착하여 부대 편성을 하고 작전지역으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알려졌 지만 일부 사병은 단지 1주일간 제식훈련 정도만을 받고 배치된 경우도 있 었다.39이 병력충원에서도 대부분의 군인들이 정예요원이 아닌 부상병이나 탈 영병 등 비정상적인 군인의 비율이 높았고, 따라서 부대의 전체적인 자질이 나 전투성이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었는데, 학도연맹원 출신으로서 5중대원 들의 주민 학살현장을 목격한 윤채병은 “그들은 군인이라 볼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97) 사단장 최덕신도 11사단 사병들을 교육시킬 시간이 없었 음을 고백하였고 제대 지휘관들도 동일하게 평가하였다.11사단 창설 당시 나타난 이러한 문제점들은 토벌작전에 대한 충분한 교육이나 주의사항을 주 지시킬 필요성이 절실하였는데도 시간에 쫓겨 이를 이행하지 못한 채 부대 를 작전에 투입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같은 20연대 2대대 소속이라고 하더라도 〈표 14>에서 보듯 5중대 작전지역에서 민간인 희생사건398)이 유독 많았던 이유는 5중대 작전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공비와의 실제 교전 경험과 그것으로 인해 초래된 군인들의 공포감과 보복섬 등 감정적 대응도 원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5중대장 권준 옥이 매우 난폭한 성격으로 인명을 경시했던 점, 5중대 군인들의 훈련이 부 족하였고 규율이 없었던 점 등이 동시에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99) 그러나 일부 중대장들은 대민관계에서 매우 신사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노력으로 민간언 희생을 줄인 경우도 많았다. 3대대 12중대 고 바로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을 위해 투입되었다. 396) 9중대원 출신인 송규석은 업대 3일 만에 훈련소에서 삼랑진으로 이동하였고, 10중대 강성근은 총기도 없이 훈련을 받은 후 박격포 주특기를 받아, 화순 동복면에 주둔한 후부터 포 조작 방법을 배웠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송규석 녹취록(2007.12.1 1.) 참고 인 강성근 녹취록(2007.12.13.) 397) 참고인 윤채병 진술조서 (2006.6.8.) 398) 20연대 2대대 5중대가 주둔하였던 함평지역의 경우 집단희생사건이 8회에 걸쳐 200여 명이 5중대에 의하여 살해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 함평 11사단사건진실 규명결정 (2007.7.3.) 399) 5중대장 연락병 김일호와 5중대에 동원되어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한 함평군 해보면 학 도연맹원 정현모의 진술에 의하면 5중대장 권준옥의 행동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 으로 파악되며, 5중대 중사였던 박병인은 중대장이었던 권준옥이 군수과 출신으로 전 투경험이 없던 인물이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전투경험이 없다. 또 우리들한테 시키고 하는 것 보니까 무대포였다. 군수과에 있던 놈이 일선 중대에 와 놓으니까 뭐 아느냐 이런 식으로 말도 해 놓고… 군수장교가 와서 기습을 당하니까 겁 집어 먹었는지 화풀 이 한 것이다" 박병인 진술녹취록(2007.4.29) - 9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