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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국회 조사당시 함평사건 생존자 정일웅은 “그 사람(5중대장)이 와 가지고 말한 것은 하루에 공비 몇 명과 무기 얼마를 사살하고 압수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88) 이러한 사실은 월야지서 토 벌대장이었던 오정인, 이발소를 운영했던 윤주원의 진술에서도 확인된다.389) 당시 5중대는 함평지역의 여러 마을에 들어가 주민 소개작전을 할 때도 팽 이 삽 쇠스랑 도끼 등을 반드시 가져오도록 하여 노획무기의 전과로 보고하 였는데,39이 이 같은 내용은 공비사살과 무기노획이 중요 작전목표였으며, 그 것이 대대, 연대에 그대로 보고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50년 말경 6 중대 청년방위대 중대장으로 있으면서 연대본부에서 사살한 인명 수 등의 내용을 적은 5중대 전과표를 보았다는 윤석근의 진술에서도 뒷받침된다}91) 11사단 20연대 2대대 8중대 사병이었던 김성순은 당시 군이 “전과를 올리 기 위해 중대장이 소대장이나 분대장을 모아놓고 일정 무기탈취 및 사살한 적의 귀를 잘라오도록 지시하였다”고 진술하였다.392) 한편 한국정부,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민간인집단희생의 주요 책임자 및 지휘관에 대해 처벌 대신 이들을 사면하고 나아가 포상하기도 했다. 거창사 건 관련자의 경우 사건이 공론화된 이후에 신성모, 최덕신은 영전했으며, 김 종원, 오익경, 한동석, 이종대 등은 무죄 또는 최고 무기를 선고받았으나 1년 이내에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특히 거창사건 은폐, 조작 의혹의 두 주역 인 김종원과 신성모는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주 한 미국대사 무초는 “김종원은 이승만에 의해 직접 선택되고 직접 보고하며 직접 지시를 받는 인물이었다”고 말했다.393) 거창사건 재판 이후 이기붕 국 방장관이 김종원의 석방을 반대하자 이승만은 김종원을 충무공 이순신에 비 유하여 석방시키라는 담화를 직접 발표하기도 했다. 388) 정일웅 증언, 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속기록J 16쪽, 1960.6.9. 389) “사건 전에 작전회의에 3번 정도 참석하였는데 한번은 대대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고 중대장이 공산주의자라고 인정하고 부역을 한 사람은 무조건 50명씩 죽이라고 했는데 결국은 덮어놓고 죽이라는 얘기였다" 참고인 오정인 진술조서 (2006 12. 13.); “5중대 군 인들이 크리스마스 전 이발소에 와서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상부로부터 하 루에 공비 50명씩을 죽이라는 지시가 왔다는 내용이었다" 참고인 윤주원 진술조서 (2007. 5. 17.) 390) 유창기 증언, 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l, 사회문화원, 275쪽. 391) 참고인 윤석근 진술조서(2006.12.13.) 392) 김성순 진술녹취록(2007.12.13.) 393) FRUS, 1952-54. Vol. 15. 47-50 (박병렴, 「국면형성과 내적 평정 : ‘거창사건’의 사례 연 구」, 『한국정치학회보.!l, 제36집 2호, 한국정치학회, 2002. 여름, 69-91) - 9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