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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세가 영향력을 미친다고 간주되던 마을에 진입하던 군의 입장에서 보면 수복 시 빨치산과 민간인을 구별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11사단 소 속 많은 참전사병들은 이구동성으로 마을에 들어갔을 때 주민들을 ‘적인지 민간인인지 구분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총을 쏘아야 했다“고 진술하였다}7키 사건발생 당시 빨치산이나 지방좌익들은 지역사정에 밝은 반 면 국군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현지 우익의 협조를 얻었다. 특히 사병들은 언제 어디에서 ‘빨치산’이 기습할지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에 상당히 예민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380) 이러한 심리상태는 토벌작전 시 적을 과대평가하여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여기는 작전을 펴도록 하였다 381) 담양 대덕지서에서 의경으로 근무했던 이복호는, “경찰이 되기 전 박기병 연대(20연대)에서 학도호국단 간부로 8일간 집체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데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모두 공비이거나 통비분자이니 죽여야 된다’고 하 는 말을 들은 적 이 있다”고 진술하였다.382) 삼계지서 의경이었던 고광열(당시 21세)도 “수복 이후에 부역자 색출활동 이 심하게 이루어졌는데, 좌익과 보도연맹원 가족들에게 피해를 입은 경찰가 족이나 지방유지들이 조금이라도 좌익으로 활동했을 것 같은 사람은 무조건 처형하였고, 젊은 사람들은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죄도 묻지 않고 처형하였다”고 진술하였다.383) 당시 1중대 사병이었던 김충만은 군인들이 (순창)가마골과 같은 적성지역 거주민들에 대해 기본적으로 모두가 적이라는 전제를 두고 대하였다고 진술 하였다}84) 결국 토별작전 시 모든 작전과 명령은 적과 아를 구분하기 어려운 게릴라 전의 일반 특성 혹은 지휘관들의 호남지역 상황인식과 현지 판단 위에서 하 달되었고 또 사병들에게도 공유되었을 것이다. 지휘관을 비롯한 사병들은 빨 379) 양두호 면 담녹취 록. 2009.7.30 380) “나 아니면 다 적으로 생각했다" 참고인 윤정호 진술녹취록(2008.9.1.) 381) 김동춘, 『전쟁과 사회.!I, 돌베개, 2006, 219쪽. 382) 참고인 이복호 진술조서 (2008.9.1 1.) 383) 참고인 고광열 진술조서(2008.7.27.) 384) “친절하게 나오는 여자들이 나중에 총을 꺼내 죽이는 경우가 있으니 무조건 적으로 알 고 상대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죠. 어떤 사람이 양민인지 모르니까. 예쁜 아가씨가 나한 테 애교를 떨면서 막 다가올 때는 그 아가씨가 나의 적이라는 교육을 받았거든요. ‘그 런 사람이 바로 적이다. 곧 권총이 나온다. 날 쏠 것이다. 그러니까 이걸 안 죽이면 내 가 죽는다’라는 교육을 받았던 거죠" 참고인 김충만 진술녹취록(2008.l1.20.) - 931 -